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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09 15:31 수정 : 2008.12.09 15:31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33. 이란의 반격

1981년 가을부터 이란은 이라크 군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1982년 3월 이란 영토에서 이라크 군대를 퇴각시키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구사했다. 이에 따라 후제스탄(Khuzestan)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이라크 군대를 고립화시켰고 1982년 5월 24일 주요 항구도시 호람샤흐르(Khorramshahr)를 탈환했다. 호람샤흐르는 샤트 알 아랍 수로로 연결되어 있고 이란-이라크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전쟁박물관이 있고 이 박물관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관 바닥에 그려져 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기를 밟고 지나가야 한다.

이란의 공세는 사실상 ‘인해 전술’에 의한 것이었다. 1979년 11월 호메이니의 지시로 조직된 바시즈(Basij)는 각 지역의 사원을 중심으로 투철한 혁명의식으로 무장한 민병대였고 이슬람혁명 이후 거리에서 전위대 역할을 담당했다. 바시즈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제3대 이맘이 순교한 ‘카르발라 전투’로 규정하면서 시아파의 순교자 정신과 애국주의를 강조했다. 바시즈는 학교 방문과 언론매체를 통해 어린 소년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국영방송에서는 어린 소년이 군복을 입은 채 총을 운반하며 바시지의 붉은 머리띠를 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소년은 이슬람을 위해 군인이 되었고 이라크에 대항해 자유를 위한 투쟁이 얼마나 멋진 지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이라크와 아랍인들은 나쁜 무슬림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과 함께 전쟁터로 달라가자고 호소했다. 이 홍보에 대한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10살에서 18살짜리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학교와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했다. 그들은 불충분한 군사훈련과 일부 무기를 가지고 전장으로 보내졌고 이라크 군이 설치한 지뢰밭에 들어가 폭탄을 제거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되거나 전쟁포로가 되었다.

포옹하는 이란군 아버지와 아들.유달승의 중동이야기

호람샤흐르 전투 이후 사담 후세인은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중동 전역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은 ‘갈릴리의 평화작전’이란 이름으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했고 이후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의 침공 명분은 테러조직의 제거였지만 레바논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1982년 6월 10일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란 영토 내의 이라크군 철수와 휴전협정을 발표했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수세에 몰린 이란과의 전쟁에서 명예롭게 끝내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란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전쟁 종결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이란에서 이라크군의 완전 철수, 둘째, 전쟁보상금 1,500 억 달러 지불, 셋째, 전쟁도발자 사담 후세인 처벌, 넷째, 10만 이라크 망명정부 인사의 귀국 보장, 다섯째, 이란 군이 레바논 참전을 위해 이라크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 보장이었다.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단순히 양국 간의 전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국가의 수호를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혁명이 이란의 국경선 안에 머물러 있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점령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이라크에서 포악한 통치자를 제거하고 예루살렘을 해방하는 것이다.” 호메이니의 아들 아흐마드는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우리에게 혁명의 힘, 이맘의 힘 그리고 서구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8년간 우리의 뉴스는 세계적인 주요 이슈였다. 우리가 이라크에 보냈던 미사일은 이맘의 사상과 함께 세계로 퍼졌다. 그것은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이맘의 노선을 의미했다. 그것은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저항을 창조했다.”


이란 여성 민병대.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983년 이란 군대는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투데당은 이러한 군사작전을 반대하면서 유엔 평화안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란 정부는 곧바로 투데당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면서 2월 투데당의 서기장을 비롯한 5천여명의 당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혁명 초기 투데당은 이슬람혁명을 지원했고 1981년 초 제17차 총회에서 성직자 정권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슬람 정권은 무자헤딘 할크를 붕괴시킨 이후 점차 투데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83년 대대적인 탄압으로 사실상 투데당은 붕괴되었다. 5월 1일부터 일년 동안 누레딘 키아누리(Nureddin Kianuri) 서기장과 에흐산 타바리(Ehsan Tabari) 당 이론가는 텔레비전에 출현해 소련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자백했다.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사실상 이란에서 좌파 세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누레딘 키아누리와 에흐산 타바리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이슬람공화국에 협조하면서 사면되었지만 핵심 당원들은 대부분 구속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1985년 5월 투데당은 이슬람공화국의 전복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 역할과 활동은 미미한 상태이다.

이란 정부는 사실상 두 개의 전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 전쟁은 이라크라는 외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또 다른 전쟁은 이란 내부 좌파 세력과의 전투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란 내부의 반대파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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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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