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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27 18:11 수정 : 2008.10.27 18:20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31. 바니 사드르와 무자헤딘 할크의 몰락

이란은 외부적으로는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또다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이슬람공화당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고, 무자헤딘 할크(Mujahedin Khalq)도 이 싸움에 결합하면서 거리투쟁으로 확산되었다.

무자헤딘 할크의 깃발
무자헤딘 할크는 1953년 친미 쿠데타로 모사데크 정부가 붕괴된 이후 자유주의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국민전선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슬람사회주의 게릴라조직으로 1963년 6월 봉기를 계기로 보다 급진적인 혁명운동을 주장하면서 1965년에 노동자와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무자헤딘 할크는 ‘민중을 위한 전사’라는 뜻이다. 무자헤딘 할크는 창립선언문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슬람의 종교적 가치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고를 종합하는 것이다. 진정한 이슬람은 사회발전론, 역사결정론, 계급투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언급했다. 무자헤딘 할크에 따르면 신은 평등한 사회건설과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예언자를 세상에 보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 세상에 나타났으며 신의 계시는 가난, 불평등 및 억압에서 해방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무자헤딘 할크의 깃발 가운데 움켜준 총은 무장투쟁을 상징하는 것이고 낫과 모루는 농민과 노동자, 이란의 지도는 국가적 공감대를 의미한다. 나뭇잎은 세계평화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원은 국제주의를 의미하며 붉은색은 시아파를 상징한다.

그들은 반팔레비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이슬람혁명 이후에는 이슬람공화당을 비판하면서 반호메이니 전선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무자헤딘 할크의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Masud Rajavi)는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선거공약으로 헌법개정을 주장하면서 이슬람공화당의 전제정치 반대, 반제국주의 세력의 단결, 농민에게 토지분배, 노동자에게 일자리 제공 등과 같은 공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선거위원회는 이슬람공화국 헌법을 반대하는 자는 후보가 될 수 없다고 대통령 후보자격을 박탈했다. 1980년 호메이니는 신년 메시지에서 이슬람과 마르크스를 혼합시켜 서구사상에 물든 절충주의자라고 비난했고 1981년 초부터 무자헤딘 할크 조직의 사무소를 폐쇄시키고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슬람공화당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무자헤딘 할크는 학교와 공장을 중심으로 반호메이니 투쟁을 확대시켜 나갔다. 바니 사드르와 무자헤딘 할크는 미대사관 인질 사태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현 정권이 중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미대사관 인질 사태는 국제사회의 관례를 무시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무자헤딘 할크는 호메이니가 성직자 독재정권을 수립했다고 비난하면서 성직자의 독재는 바자르 상인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고뇌하는 호메이니

1981년부터 바니 사드르와 무자헤딘 할크는 연합전선을 형성해 본격적인 거리투쟁에 나섰다. 3월 5일 테헤란대학교에서 개최된 모사데크 추모식에서 바니 사드르가 연설을 하려는 순간 헤즈볼라가 “자유주의자와 위선자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방해하자 무자헤딘 할크 조직원들이 반발하면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4월 27일 무자헤딘은 테헤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고 또다시 헤즈볼라와 대치했다. 심각한 무력충돌은 없었지만 정부는 무자헤딘 할크의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그들은 바니 사드르에게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도록 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바니 사드르는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6월 8일 그는 쉬라즈의 공군 기지에서 독재에 대항해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이것은 봉기를 의미하며 그는 군대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6월 10일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의 군 통수권을 박탈했다. 하지만 바니 사드르는 1979년 이슬람 혁명처럼 ‘독재정권’에 대항할 것을 호소했고 무자헤딘 할크는 바니 사드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6월 13일부터 이틀에 걸쳐 30여개의 도시에서 약 100만명의 시위대들이 거리 행진을 벌였다. 6월 20일 무자헤딘 할크는 다양한 반대세력들을 결집시켜 독재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는 호메이니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테헤란 남부 페르도시 광장 부근에서 무자헤딘 할크와 헤즈볼라가 무력 충돌했고 이슬람공화당은 시위대를 ‘신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 20여명, 부상자 200여명이 발생했다. 6월 21일 의회는 바니 사드르가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공표했고 다음날 호메이니는 그를 해임했다. 바니 사다르는 곧바로 몸을 숨긴 채 무자헤딘 할크와 함께 대중 봉기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6월 28일 테헤란 남동부에 위치한 이슬람공화당사 폭발 사건으로 이슬람공화당 총재 베헤쉬티를 비롯한 70여명의 당원들이 사망했고 하메네이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무자헤딘 할크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설하는 호메이니
6월 29일 바니 사드르는 여자로 변장한 채 라자비와 함께 파리로 망명했다. 그들은 함께 파리에서 이란국민저항위원회(NCRI)를 창설했다. 하지만 이란국민저항위원회에는 망명 이전 6월 테헤란에서 조직을 발족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화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은 바니 사드르, 이란국민저항위원회 의장은 라자비가 맡았다. 이란국민저항위원회는 1983년 쿠르드민주당, 민족민주전선과 연합하면서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고 이란 내에 조직망을 건설해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1984년 라자비가 이라크와의 관계를 강화하자 바니 사드르는 이 단체를 탈퇴했다. 1986년 프랑스 정부는 레바논의 헤즈볼라에게 억류되어 있던 기자 석방을 위해 이란 정부와 협상을 하고 무자헤딘 할크의 추방을 결정했다. 라자비는 파리를 떠나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본부를 옮겼다.

이란국민저항위원회는 2002년 8월 이란 핵의혹을 폭로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현재 이란의 핵 사태는 사실상 이란국민저항위원회의 폭로 이후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란국민저항위원회는 사실상 무자헤딘 할크의 전위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무자헤딘 할크는 이슬람공화국에 반대하는 가장 규모가 큰 군사조직으로 이라크에 군사캠프를 가지고 있고 유럽, 미국 및 캐나다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무자헤딘 할크는 1997년 미 국무부의 테러단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2004년부터 테러단체 리스트에서 제외되었고 현재 미군의 지원 아래 특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슬람공화당사 폭발사건으로 부상 당한 하메네이를 찾아온 라자이 대통령.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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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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