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의 중동이야기] 30.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이라크는 전쟁 초기에 도화선이었던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를 장악했고, 곧바로 후제스탄(Khuzestan)의 주요 도시 호람샤흐르(Khoramshahr)와 아바단(Abadan)을 점령하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대부분의 서구 군사전문가들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견했다. 하지만 이 예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들을 대규모 민병대로 조직해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 지속되었고 양국은 (비공식)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이라크 30만명, 이란 70만명)가 발생했고 3천억 달러 이상의 전비가 소모됐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이라고 불렀는데,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637년 이라크의 카디시야에서 제2대 칼리프 우마르의 아랍군대는 페르시아의 사산조(224-651) 군대와의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사산조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반면에 이란은 이 전쟁을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 명명했다. 즉, 미국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라크의 침공을 비난하려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고 나선다. 또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지우고 미군의 무기가 이라크로 송달되는 것을 승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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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속의 이란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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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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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아랍인과 이란인의 민족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라크는 셈족 계통의 아랍인이지만 이란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페르시아인이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 즉 무지의 시대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 이슬람 이후 아랍사회에 나타난 문명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그 자체로 거대한 문명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랍 무슬림에 의해 나라가 점령당해 종말을 맞이한 자존심 있는 제국이었고 또한 이란인의 정체성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아랍인과 이란인의 뿌리깊은 대립의 역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그의 후계자들이 정복사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랍인들은 637년 페르시아의 사산조(224-651)를 멸망시키고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가 이슬람제국의 일부로 병합되면서부터 이란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아랍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이란인들은 다수파인 순니파를 버리고 소수파인 시아파를 선택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16세기초에 등장한 사파비조(1501-1732)는 이슬람세계에서 최초로 시아파를 국교로 한 페르시아 민족국가였다. 이때부터 아랍인들과 이란인들은 이슬람세계의 두 민족으로서 반목과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번째로는 종교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슬람은 크게 순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진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세계는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양분되었다. 순니파는 아랍인의 관습에 따라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쿠란, 예언자의 언행록 및 정통칼리프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슬람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슬람국가를 통치해 왔다. 반면에 시아파는 예언자의 사위이자 제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게 칼리프위를 돌려주려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알리의 차남 후세인은 680년 이라크의 쿠파(Kufa) 근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시아파에서는 알리와 그의 자손들을 이맘(Imam)이라고 부르고 이맘이 이슬람공동체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분쟁의 근원은 중세이슬람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순니파이건 시아파이건 이슬람은 이라크에서 발전되었다. 순니파는 중세이슬람제국인 압바스조(750-1258)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에서 성장하였으며 시아파는 이라크의 남부지역에서 발생하여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라크의 북부에서는 순니파, 남부에서는 시아파가 강하였다. 이라크의 전체 인구에서 시아파는 55-60%를 구성하였으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 순니파보다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체 인구의 35-40%를 차지하는 순니파는 수적인 면에서 시아파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래 오늘날까지 이라크의 정치를 지배하여 왔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시아파는 항상 순니파의 억압과 박해의 희생물이 되어 왔다. 오랜 기간 동안 순니파는 권력을 장악하였고 시아파는 변혁과 현상타파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아파는 오늘날에도 이라크의 정치에서 내부불만세력으로 커다란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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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중 예배 드리는 이란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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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자 이라크 내의 시아파는 크게 고무되었다. 더욱이 호메이니는 15년동안 이라크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그곳의 시아파 지도자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다와(Da'wa)당을 결성하여 이라크 공산당과 쿠르드족 민주당과 연합전선을 펼쳤다. 한편, 이란의 혁명정권은 정권수립초기부터 이라크에 이슬람혁명이데올로기를 수출하고자 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에게 이라크정권에 항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사우디 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에서 시아파의 폭동이 일어났고 또한 주위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라크의 남부지역 나자프(Najaf)에서는 시아파 성직자를 시위음모죄로 체포하였다.
세 번째로는 국경선 문제가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은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를 둘러싼 영유권 확보와 경계선 설정 문제였다. 이 수로는 이란의 유일한 대아랍국경이며 대이라크 국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수로는 페르시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전략적으로 이란과 이라크 양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는 양국 간 분쟁의 근원이 되었다.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는 1937년에 체결된 양국간 국경협정에서부터 제기되었다. 이 협정에서는 양국 간의 경계선을 수로의 동안으로 임시 결정함으로서 이라크가 이 수로의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이란은 국제법의 관례를 들어 이 수로의 계곡선(강의 가장 깊은 곳)을 국경선으로 정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측의 의도는 당시 중동지역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이 이라크를 지지함으로서 실패했다.
1968년 영국군의 철수선언과 더불어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1969년 4월 15일 이라크 정부는 이란에게 이 수로가 이라크의 영토이므로 이란의 모든 선박들은 이 수로 내에서 이란 깃발을 달지 말아야 하며, 이란 해군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그 보복조치로서 1937년 국경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라크의 이란 선박에 대한 간섭행위는 무력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팔레비 정권은 1969년 4월 22일 해군과 공군의 호위 아래 이란 깃발을 게양한 채 선박들을 수로에 항해시켰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는 이같은 이란의 강경조치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잦은 정권교체로 인해 대외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군은 국내 쿠르드족과 대결하고 있었으며 시리아와 요르단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동부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투입되고 있어 이란에 대한 군사력 행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수로의 영유권 문제가 어느 정도 공식 해결된 것은 1975년 알제이협정이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이 이라크 내의 정치,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고 있던 쿠르드족의 반란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수로의 계곡선을 양국간 경계선으로 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이라크의 자발적 동의보다는 어쩔수 없는 다급한 현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라크로선 항상 이 협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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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훈련 중인 이란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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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크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 채 종식되었다.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해 합병하자,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전면적으로 무력 개입한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 걸프 전쟁은 1991년 2월 28일 개전 43일, 지상전 개시 나흘만에 이라크의 완패로 끝났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의 무장해제와 사담 후세인의 23년 철권통치 종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2006년 12월 30일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중 1982년 이라크 두자일 마을에서 시아파 주민 148명의 학살 주도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때 미국의 동지였던 사담 후세인은 그들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란은 이라크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의 봉쇄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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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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