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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6 17:15 수정 : 2008.09.16 17:15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9. 문화혁명과 이란이슬람공화국 국기

바니 사드르
1980년 1월 25일 자유주의 성향의 바니 사드르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초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대신 잘랄레딘 파르시(Jalaleddin Farsi)라는 다른 인물을 선호했었다. 파르시는 ‘이슬람사회의 연합’의 지도자였고 이슬람국가 설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이슬람전사’(Fedayan-e Eslam)와도 밀접한 인물이었다. ‘이슬람사회의 연합’은 1962년에 설립되었고 호메이니를 지지했던 상인들의 조직이었다. 하지만 파르시의 아버지는 아프간 출신이었다.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 제115조에는 이란 대통령의 자격조건으로 이란인 출신과 이란 국적을 가져야 한다는 조항이 규정되어 있었다. 결국 호메이니는 파리 망명 시절 측근이었던 바니 사드르를 선택했다. 바니 사드르는 75.7%의 지지로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바니 사드르는 성직자 조직을 약화시키기 위해 혁명기구들을 단계적으로 해체시켜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진하려 했으나 미 대사관 인질 사태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슬람 강경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제1차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슬람공화당은, 총 216석 가운데 130석을 차지하면서 최대정당이 되었다. 이란의 선거제도는 전체 의석수를 인구 비례에 따라 할당해 다득표 순으로 결정하는 대선거구제이다. 자유주의 성향의 바니 사드르의 이란자유운동은 소수 의석만을 차지했고 무자헤딘 할크와 투데당과 같은 좌파정당들은 한 의석도 얻지 못했다. 제1차 국회의원 선거 이후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이슬람공화당이 대립하게 되었다. 바니 사드르 대통령이 추천한 수상을 의회에서 거부하면서 이슬람공화당은 모함마드 알리 라자이(Mohammad Ali Rajai)를 수상으로 제안했다. 라자이는 ‘이슬람사회의 연합’ 구성원이자, 이슬람공화당과 긴밀하게 연계된 인물이었다. 바니 사드르는 공개적으로 자질 부족을 근거로 라자이를 비난했다. 수상 선출을 둘러싼 바니 사드르와 이슬람공화당의 갈등은 2달에 걸쳐 진행되다가, 8월 호메이니가 이슬람공화당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종결되었다.

연설하는 호메이니
1980년 봄 이란에서는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났다. 이슬람공화국은 이를 ‘문화혁명’이라고 부른다. 4월 18일 호메이니는 금요예배에서 좌파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교를 겨냥해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우리는 경제 제재나 군사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서구의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대학교를 제국주의 대학교라고 규정하고 대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을 서구화된 반동들이라고 비난했다. 다음날 헤즈볼라는 쉬라즈(Shiraz) 대학교의 좌파 학생사무실을 공격했고 이어서 아흐바즈(Ahvaz) 대학교와 라쉬트(Rasht) 대학교에서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6월 12일 대학의 이슬람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문화혁명 본부가 설치되었고 곧이어 2년 동안(1980-1982) 이란의 모든 대학교들이 폐교되었다. 문화혁명의 목적은 이슬람 문화에 기초한 다양한 강좌를 대학교에 개설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좌파 계열의 대학교수를 축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좌파 성향의 대학교수들이 대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문화혁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이 기구는 1984년 12월 최고문화혁명위원회로 바뀌었다.

1980년 7월 29일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새로운 국기를 제작했다. 이 국기는 기존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국가의 상징과 문장만을 바꾸었다. 이란의 국기는 위로부터 녹색, 백색 및 적색 3색의 균일한 폭과 길이로 구성되었다. 녹색은 믿음, 백색은 평화 그리고 적색은 성전을 상징한다. 하지만 3색은 이란의 전통적인 사회계급을 의미하고 있다. 고대이란의 신분제도를 살펴보면 제1신분 제사장, 제2신분 전사 및 제3신분 농민이 존재했다. 고대이란인의 세계관은 리그 베다(Rig Veda)에 기원을 두고 있다. 리그 베다는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집으로 초기 아리안족의 종교경험, 관습 등을 기록한 최고(最古)의 문서이다.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리안족(Aryan)이고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의 동부 지파에 속한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남부지역에 거주했고 기원전 2500년경부터 이란고원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기원전 10세기경 이란고원에 정착해 기원전 8세기말경 새로운 왕조를 수립했다. 메디나조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고 하마단에 수도를 세웠다. 이란인의 역사와 문화는 아리안족의 전통과 관련되어 있고 이것은 중동의 다른 국가들과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란이슬람공화국 국기

고대이란인들은 초원지대에서 생활하면서 엄격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란인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대이란의 신화에서 우주는 땅, 하늘 그리고 대기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땅은 사발의 아랫부분을 상징하고 하늘은 뒤집어진 사발의 윗부분을 나타냈다. 하늘과 땅은 세계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두 사발의 사이에는 대기가 가득 차 있다. 사실상 고대이란인의 우주관은 그들의 사회조직을 반영한 것이다. 반면에 다른 자연환경에서 형성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세계관은 이란과는 달랐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가장 오래된 인류문명 중의 하나가 성립된 곳이다.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의미이다. 즉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땅을 지칭한다. 이 땅의 길이는 약 650 Km이고 너비는 약 200 Km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세계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대양의 내부에서 밖으로 나왔다고 믿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중앙집권적인 관개시설을 토대로 강력한 왕권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집트인의 신화에서도 세계는 대양에서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이집트의 지리적 환경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고대그리스 역사가 헤르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는 말했다. 이 말은 단적으로 나일강이 없으면 이집트도 없다는 말이다.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온건하고 규칙적이다. 나일강은 다른 문명권의 대하처럼 대홍수를 일으켜 사람과 가축과 논밭을 무참히 쓸어가거나 격심한 가뭄으로 대기근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이집트에는 다른 문화권과 같은 “대홍수의 전설”이 없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창조신으로 숭배되었다. 파라오는 절대권력을 바탕으로 초인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신민들에게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할 것을 요구했다. 파라오는 매의 신 호루스(Horus)로서 이 지상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오시리스(Osiris)로서 죽은 자의 세계를 지배했다. 이러한 신왕 관념은 이집트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다른 문화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신화에 의하면 지상을 통치했던 왕 오시리스는 악한 동생 세트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를 통해 부활하여 그의 아들 호루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계승하고 오시리스는 죽의 자의 세계에서 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살아서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 죽어서는 오시리스가 되어 사후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파라오는 영원히 살아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세계관은 그 시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회조직을 반영한 것으로 강력한 왕권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란 국기의 중앙에는 알라(Allah)를 형상화한 것이고 튤립 모양은 희생한 국민들을 추모하는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 팔레비 왕정체제에서는 떠오르는 태양 앞에 칼을 가진 사자가 서 있는 그림이 있었다. 녹색과 적색 사이에는 ‘알라는 위대하다’는 문장이 22번 반복되어 있다. 22번의 숫자는 이슬람혁명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란력 11번째 달의 22일을 의미한다. 이란의 국기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사회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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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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