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25 17:36
수정 : 2008.08.25 17:36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7. 이란이슬람공화국헌법과 마르자에 타클리드 논쟁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은 이슬람법학자통치론과 이슬람법을 토대로 구성되었고 전문, 제14장 제175조로 이루어졌다. 헌법 전문에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원리에 토대를 둔 이란국민들의 문화, 사회, 정치 및 경제의 기초가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입헌 정부의 반독재 운동과 석유민족주의의 반식민주의 운동을 계승하며 1963년 백색혁명을 제국주의와의 결탁으로 간주하고 이맘 호메이니의 지도 이념에 따라 무슬림들의 저항과 승리로 세워진 국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헌법 제5조에는 “제12대 이맘의 부재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는 그 시대상황에 정통한 공정하고 독실하며 용감하고 책략이 풍부하고 행정능력이 있는 최고지도자에게 위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최고지도자가 사실상 제12대 이맘의 대리인이고 실질적인 국가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헌법에서는 삼권분립 원칙을 규정하지만, 최고지도자가 삼권에 우선해 국정전반에 관한 최고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 헌법 제107조는 최고지도자의 자격요건을 언급하고 있다. “마르자에 타클리드이자 혁명지도자 이맘 호메이니처럼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최고지도자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헌법 제110조에는 주요 정책 집행의 감독, 군 통수권, 군사령관 임명권, 대통령 인준권 및 해임권, 사면 및 감형권과 같은 최고지도자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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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대학교에서 열린 금요예배 모습이다. 맨 앞에 하메네이가 앉아있고 두번째줄 가운데에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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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중인 하메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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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은 1989년 호메이니 사후 헌법 개정을 통해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개정 헌법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자격요건에서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조항을 삭제했고 최고지도자를 국민투표가 아닌 전문가회의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수상제를 폐지하고 부통령제를 신설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호메이니 사후 최고지도자는 1989년 6월 4일 전문가회의를 통해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i)가 선출되었다. 하메네이는 1939년 마샤드에서 태어났고 마샤드 신학교와 이라크의 나자프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58년 콤 신학교에서 호메이니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960년대 콤 신학교와 마샤드 신학교간 연락책을 담당하면서 반샤 운동을 전개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그는 호메이니의 측근으로 부각되면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1979년 이슬람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테헤란 금요예배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1981년 6월 28일 무자헤딘 할크에 의한 이슬람공화당사 폭발사건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오른팔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제3대와 제4대 대통령이 되었고 1989년 5월 14일 대통령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과 이란은 그의 방문을 기념하여 매년 ‘조선과 이란 친선 주간’을 정해 사진 전시회와 영화감상회를 진행하고 있다.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종교지도자(마르자에 타클리드)이자 정치지도자(Rahbar: 최고지도자)였지만 그 당시 하메네이는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마르자에 타클리드와 최고지도자 사이에 분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헌법 개정을 통해 최고지도자의 자격요건에서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조항이 삭제된 것이다. 호메이니 사후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아야톨라 모함마드 레자 골파예가니(Mohammad Reza Golpayegani)에게 계승되었다. 골파예가니는 1898년 골파예간 부근의 고가드(Gogad) 마을에서 태어났고 오랜 세월 콤 신학교에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수행하면서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고 종교적인 덕망도 높아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추대되는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1993년 12월 10일 그가 사망했을 때 20여명의 추종자들이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을 정도로 애도의 물결이 흘러 넘쳤다.
골파예가니의 사망 이후 마르자에 타클리드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이슬람공화국의 고위급 관료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하메네이를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추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야톨라 모함마드 야즈디(Mohammad Yazdi) 대법원장은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슬람 혁명 이전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각 도시마다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존재할 수 있었 . 이맘 호메이니는 이슬람과 이슬람정부의 수호를 강조했고 이에 따라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다른 형태로 논의되었다.” 그는 또한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강조하면서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종교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및 국제관계의 문제에도 정통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즈디는 콤 신학교에서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기준에 대해 논의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은 하메네이를 추종하다고 말했다. 호자톨에스람 나테케 누리(Nateq-e Nouri) 국회의장도 하메네이를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부터 이란의 언론에서는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시대와 공간’의 환경에 정통해야 한다는 논쟁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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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메네이, 마샤드 성작자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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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앞쪽), 라프산자니(왼쪽) 그리고 하메이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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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야지드의 발언은 콤 신학교와 그곳의 자주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콤 신학교는 팔레비 정권시기에도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주성을 수호했다. 콤 신학교는 당시 최고령의 아야톨라 모함마드 알리 아라키(Mohammad Ali Araki)를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소개했다. 아라키는 1894년 아라크에서 태어났고 콤 신학교에서 35년동안 강의하면서 수많은 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호메이니도 그의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콤 신학교의 또다른 교사 아야톨라 아자리 콤미(Azari Qomi)는 레살라트(Resalat) 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아라키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메네이를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호메이니 사후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골파예가니에 이어서 아라키로 연결되었다.
고령이자 노환이었던 아라키는 다음해 1994년 11월 30일 사망했다. 아라키 사망 이후 마르자에 타클리드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2월 2일 콤 신학교는 일련의 논의를 중단시키기 위해 일곱 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그들을 마르자에 타클리드의 자격이 있는 후보자들이라고 소개했다. 하메네이, 란카라니(Mohammad Fazel Lankarani), 베흐자트(Mohmmad Taqi Behjat), 호라사니(Hussein Vahid Khorasani), 타브리지(Mirza Javad Tabrizi), 잔자니(Musa Shobairi Zanjani), 쉬라지(Naser Makarem Shirazi). 마침내 하메네이는 일곱 명 중의 한 후보로 소개되었다. 현재 최고지도자로 한정된 그의 지위는 본격적으로 마르자에 타클리드에 대한 논의로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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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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