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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1 14:57 수정 : 2008.08.11 17:02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5. 권력의 중심에 선 호메이니

이슬람혁명 이후 모든 권력은 호메이니에게 집중되었다. 호메이니는 끊임없이 정치인들을 만났고 대중연설을 통해 카리스마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호메이니의 대중연설은 군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마력을 가지고 있다. 낮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그의 연설은 군중의 마음을 읽고 있듯이 군중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면서 때로는 눈물의 바다를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분노의 태풍을 몰고 왔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과정의 대중연설에서 자신을 ‘이슬람혁명의 아버지’라고 언급했고 대중들을 ‘혁명의 아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이슬람혁명 이후에는 대중들을 ‘나의 혁명 형제와 자매’라고 언급했다. 호메이니는 자신과 대중들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간의 혈연적인 특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형성했고 이를 토대로 종교적 카리스마를 결합시켜 ‘이맘’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호메이니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통해 현실정치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먼저 호메이니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공화당(IRP)을 결성했다. 새로운 정당 결성에 대해서는 1977년 이라크 나자프와 1978년 프랑스 파리에서 몇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샤의 공포정치로 인해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실천할 수가 없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이론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단일정당론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단체는 하나로 통합, 즉 이슬람단체로서 통합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양한 단체의 설립이 국가에 치명적인 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정치조직의 통일성을 구축했다. 이슬람공화당은 아야톨라 모함마드 모세이니 베헤쉬티(Mohammod Hosseini Beheshti; 1928-1981)의 주도로 창당되었다. 베헤쉬티는 에스파한 출신으로 1965년에서 1970년까지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는 이슬람센터 소장을 역임했고 유럽에 있는 이란 유학생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명성을 높였다. 이 기간 중에 모함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 제7대와 8대 이란대통령)는 그와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제1대 국회의장과 이슬람공화당 총재로 활동하면서 이란 정계에서 2인자로 주목받았지만 1981년 6월 28일 무자헤딘 할크의 소행으로 알려진 이슬람공화당사 폭발사건으로 70여명의 당원들과 함께 사망했다. 베헤쉬티는 순교자라는 의미의 샤히드(Shahid)라는 호칭을 받았고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의 도시 곳곳에 ‘샤히드 베헤쉬티 거리’가 만들어졌다. 또한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테헤란 북부의 에빈(Evin) 부근에는 샤히드 베헤쉬티 대학교가 설립된다. 원래 이 대학교는 1959년 이란국립대학교라는 명칭으로 존재했지만 1983년 샤히드 베헤쉬티 대학교로 개명하였다. 이슬람공화당은 제1차와 제2차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최대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1987년 6월 이슬람공화당의 당내 불화와 내부 분열을 비판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시켰다.

군중들에게 답례하는 호메이니

군중들에게 답례하는 호메이니

두 번째로는 이슬람혁명을 수호하고 반혁명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호메이니의 지시로 이슬람혁명수비대를 5월에 창설했다.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슬람혁명위원회의 관할 아래 두었고 아야톨라 하산 라후티(Hasan Lahuti)가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다. 초기에는 400명에서 시작하여 1979년 말에는 25,00명으로 늘어났다. 현재 이란의 군사조직은 정규군(40만명)과 이슬람혁명수비대(12만 5000명)로 이원화되어 있고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란의 최정예부대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정규군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별도의 지상군, 해상군 및 특전부대를 보유한다. 2007년 10월 1일 미 주간지 뉴요커는 이란 핵시설 공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이슬람혁명수비대에 대한 제한된 공습으로 공격목표를 변경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이란 공격은 해상 크루즈 마사일 발사와 정밀지상공격 및 공습으로 이루어지며 이슬람혁명수비대의 주요 훈련캠프, 보급소, 지휘통제시설 등을 집중 파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앞서 9월 28일 미 의회는 이란의 정예군 혁명수비대를 ‘외국의 테러조직’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란을 압박시키기 위한 미국의 정책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혁명수비대가 사실상 이란에서 가장 강력한 특수 정예부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혁명 이후 바자르간 수상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존재했지만 권력의 중심은 이슬람혁명위원회와 이슬람혁명재판소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결성된 이슬람혁명위원회는 1980년 5월 28일 국회가 개원된 이후 7월 18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기간에 이슬람혁명위원회는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 이슬람혁명위원회는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테헤란에는 14개, 타브리즈에 34개 및 에스파한에 17개가 있었고 작은 마을에는 2-3개의 이슬람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슬람혁명재판소는 성직자와 재판관으로 구성되었지만 성직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이슬람법에 따라 반혁명세력을 숙청했다. 혁명재판소의 의장은 ‘정당한 피’라는 별명을 얻은 셰이크 사데크 할할리(Sheikh Sadeq Khalkhali)가 맡았다. 할할리 의장은 2월 15일 악명높은 정보기관 사바크(SAVAK)의 책임자 나시리(Nassiri)를 포함한 네 명의 장교를 레파 학교의 지붕에서 공개처형했고 이를 시작으로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감행했다. 바자르간 수상은 이슬람혁명재판소의 거침없는 공개처형을 비난하면서 법질서를 확립하고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팔레비 왕정체제에서 처형당한 유가족들과 고통받은 민중들은 복수를 원했고 살벌하고 잔인한 ‘피의 향연’은 멈출 수가 없었다. 바자르간 수상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나는 망가지기 쉬운 자동차와 같다. 나는 여행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이 필요하다. 당신들은 나를 위해 도로를 포장해야 한다.” 혁명초기 제1라운드에서 바자르간 수상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반혁명세력 숙청작업을 등에 업은 이슬람 강경파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왼쪽에서 네번째) 베헤쉬티

호메이니와 그의 아들 아흐마드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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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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