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04 17:50
수정 : 2008.08.11 15:19
|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4. 여명의 10일
이란에서는 2월 1일부터 2월 11일까지를 ‘여명의 10일’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은 호메이니가 이란에 도착해서 다양한 혁명세력을 규합해서 이슬람혁명을 성공시킨 10일이었다. 이슬람혁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과 반전을 반복했다. 테헤란 거리에는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시위대들은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여 군대와 대치했다. 매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아다녔다.
호메이니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세력을 규합해 새로운 혁명지도부를 구성했다. 호메이니는 성직자 중심의 추종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이슬람 좌파 그룹과 좌파 세력과도 반혁명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추진했다. 무자헤디네 할크와 페다야네 할크와 같은 게릴라 조직은 무기를 들고 테헤란과 기타 여러 도시의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테헤란의 거리는 내전 같은 상황이었다. 가레바기(Gharebaghi) 육군 참모총장은 바흐티야르와 바자르간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율했다.
2월 8일 운명의 신은 호메이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테헤란 부근 파라하바드(Farahabad) 공군기지에 있는 불사조 연대 소속의 전투기 100대가 라파 학교로 날아왔다. 그들은 샤의 최정예부대였다. 그들은 호메이니의 앞에 다가가서 충성을 맹세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호메이니를 보위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은 바흐티야르 정부에서 최후의 보루인 군대의 분열을 의미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이란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혁명세력의 사기는 높아져갔다. 게릴라 조직과 군중들은 경찰서와 군 병영을 공격했고 병기고도 습격했다.
|
라파 학교 부근의 지지자들
|
|
호메이니 지지 시위
|
마침내 바흐티야 정부는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바흐티야르 정부는 2월 10일 오후 4시 30분부터 다음날 오후 5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호메이니가 거주하는 라파 학교 주위에는 전차 부대가 출동했다. 호메이니는 이 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통행금지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고 군대가 국민들에 대한 살상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란 전역에는 시위대의 혁명 구호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총성과 함께 전투가 벌어졌다. 긴장감이 감돈 가운데 2월 11일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1시 15분 테헤란 라디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9년 2월 11일 오전 10시 20분 군 최고위원회는 무질서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정치적인 중립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모든 병사들은 기지로 즉각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호메이니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바흐티야르도 자취를 감췄다.
전투는 밤까지 지속되었지만 더 이상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호메이니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전지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영웅적인 이란의 무슬림들이여! 나는 더 이상 폭동과 불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아직까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나는 친애하는 나의 형제자매에게 임시 이슬람혁명 정부와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2월 11일은 ‘이슬람혁명 승리의 날’로 지정된 국경일이다. 이란은 이슬람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파즈르(Fajr) 국제영화제는 1982년에 설립되어 해마다 이 기간에 개최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영화도 이 국제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다. 2008년 제26회 파즈르 국제영화제에는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과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 상영되었다. 이 밖에도 파즈르 국제연극제, 파즈르 국제음악회 같은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여명의 10일’의 하이라이트는 2월 11일 테헤란의 ‘자유의 탑’에서 개최되는 이슬람혁명 기념식이다. 오전부터 테헤란의 동서남북에서 시민들은 대규모 거리행진을 통해 ‘자유의 탑’으로 집결해 혁명기념식을 개최한다. 혁명 기념식에는 이란 대통령이 이슬람혁명의 의미와 이란의 당면 과제에 대한 내용으로 연설을 한다. 2008년 2월 11일 이슬람혁명 29주년 기념식에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서구와 갈등을 빚고 있는 핵 문제를 언급하면서 핵 프로그램을 결코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란은 핵 프로그램이 ‘평화적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제조하려 한다면서 대이란 압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란은 우라늄 처리가 핵발전 원료를 얻기 위한 평화적인 것이며, 핵확산금지조약(NPT) 틀 내에서 평화적 목적을 위한 우라늄 처리와 농축은 허용돼 있으므로 자국의 핵 계획이 합법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미국은 핵 원료 기술은 핵무기 개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이란이 공개한 시설들 외에도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을 가동해 핵무기 개발 기! 술을 얻으려 한다고 주장한다.
|
바리케이트를 친 혁명세력
|
|
호메이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군인들
|
핵 파일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진실게임은 과연 무엇인가? 이란의 핵 문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2002년 8월 반체제 인사들의 폭로로 밝혀졌다. 이란저항국민협의회(NCR : National Council of Resistance)는 핵개발과 연계된 2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미신고 시설의 존재와 세부관련 정보를 폭로했다. IAEA가 수차례 핵 사찰을 했지만 이란이 핵 폭탄을 개발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란의 핵개발 시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란의 핵개발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후원으로 출발하였다. 1967년 미국의 지원으로 테헤란 핵연구센터가 설립되었고 1968년에 이란은 NPT에 가입하였다.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1973년 제1차 오일파동 이후 핵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독일과 프랑스와 공사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독일은 부쉐르 지역에 원자로 건설을, 프랑스는 에스파한 지역에 핵연구시설 건설계약을 체결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1975년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60억 달러 원자력에너지 장비를 이란에 판매하는 미국-이란 핵협정에 서명했고 1976년 포드 미 대통령은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 ?미국산 재처리시설을 이란에 공급한다고 승인했다.
이란 핵문제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미국의 이중 잣대에 있다.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별적으로 핵 문제를 다루었고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의 핵 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인도 및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 487조(1981년)와 1172조(1998년)를 위반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이란을 제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을 활용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이제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란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6년 12월 제1737호(비군사적 제재)에서 자산동결 대상은 이란의 주요 기업 10개와 개인 12명이었다. 2007년 3월 1747호(비군사적 추가 제재)에서는 개인, 단체, 기관 28곳을 자산 동결 대상으로 추가시켰다. 2008년 3월3일 1803호 유엔 제3차 결의안은 앞선 두 차례 결의안의 내용을 보완·강화한 것이다. 처음으로 민간 및 군용으로 함께 쓰일 수 있는 물품 교역도 제재 대! 상에 포함시켜 이란의 경제활동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2월 11일 이슬람혁명 기념식은 이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공판에서도 함께 진행된다. 한국에서도 주한 이란대사관은 한해의 가장 큰 행사로 혁명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
호메이니의 혁명 승리를 알리는 신문기사
|
|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