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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29 14:27 수정 : 2008.07.29 14:27

이란으로 돌아오는 호메이니.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3. 이맘의 귀환

1964년 가을 갑자기 사라졌던 한 노인이 15년 만에 이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은 샤가 떠난 지 2주 만에 이루어졌다. 사실 샤는 떠났지만 바흐티야르 수상의 섭정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바흐티야르 수상은 점진적인 정권 이양을 제안했지만 호메이니는 이 정권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그와의 회담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호메이니는 “바흐티야르가 사임하지 않으면 회담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몇 차례 귀국 일정이 지연된 가운데 1월 31일 저녁 에어 프랑스 특별기가 준비되었다. 호메이니는 함께 탑승하려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뒤따라오는 다른 비행기를 타도록 권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이 나와 같은 비행기로 귀국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투쟁 속에서 언제나 나를 따라주는 것이다.” 비행기에는 호메이니와 일부 측근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함께 탑승했다. 호메이니는 비행기가 파리공항을 출발하자 기내에서 예배를 올린 후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잤다. 승무원들은 호메이니의 그런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한 미국인 기자는 테헤란 상공에서 호메이니에게 감회를 물었다. 호메이니는 테헤란을 바라보면서 간단하게 답변했다. “아무것도 없소.”

2월 1일 아침 9시 30분 호메이니의 비행기는 테헤란의 메흐라바드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1천 만명의 이란인들이 호메이니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혁명의 깃발이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지도자입니다’ 라고 씌여진 깃발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호메이니가 비행기에서 내려오자 군중들은 커다란 목소리로 ‘신은 위대하다’를 외쳤고 그 외침은 테헤란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호메이니의 베헤쉬테 자흐라 연설

그는 공항 부근의 ‘자유의 탑’ 앞에서 귀국 소감에 대한 짧은 연설을 했다. “나는 우선 이번 사건에서 너무나도 희생적인 성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고통당했던 학생들, 상인들 그리고 무역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시장과 대학교 그리고 신학교에서 피 흘리며 지지해 주었던 젊은이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간단한 소감을 마쳤다. 호메이니는 곧바로 혁명의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테헤란 남쪽에 위치한 베헤쉬테 자흐라(Behesht-e Zahra)로 향했다. 베헤쉬트는 ‘천국’을 의미하며 파티마 자흐라(Fatima Zahra)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이자 제1대 이맘 알리의 부인이다. 즉 ‘자흐라의 천국’을 뜻하는 공동묘지이다. 이곳은 1970년에 세워진 이란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인데, 현재 16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14개 구역은 ‘혁명의 순교자’, 3개 구역은 ‘순교자의 부모’, 1개 구역은 ‘예술가와 명사’, 25개 구역은 ‘공무원’ 그리고 나머지 120개 구역은 ‘테헤란 시민’으로 분리해 두었다.

호메이니는 베헤쉬테 자흐라에 도착하자 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자들을 위해 예배를 올렸다. 잠시 후 그는 군중들을 향해 위대한 승리를 찬양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수많은 재앙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이룩했다. 모함마드 레쟈 샤는 떠났다.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한 후 도망쳤다. 그는 우리 국가를 파멸시켰다 .그가 건설한 유일한 것은 이란 전역에 있는 공동묘지뿐이다. 우리 젊은이들의 피는 자유를 위해 뿌려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강력한 국가를 원한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의 조상은 우리를 통치할 누군가를 임명할 권리가 없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를 위해 누구를 임명했는가?”라고 외쳤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바흐티야르 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이란인들의 손으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바흐티야르 정부를 ‘샤의 최후의 나약한 헐떡거림’이라고 비방하면서 이 정부의 입을 주먹으로 치기 위해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주변에서 무장하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혁명 승리를 위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나는 군인들에게 부탁한다. 우리는 당신들이 독립의 입장을 취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청년들의 피를 희생시켜 왔다.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들의 독립이다. 장성 여러분! 당신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영원히 종으로 남기를 바라는가? 국민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오라!”

호메이니를 환영하러 나온 인파.

호메이니는 레파(Refah) 학교에 임시본부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68년에 설립된 이슬람 여자고등학교로 테헤란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의회 건물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샤의 궁전을 대신해 정치활동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호메이니의 첫 번째 행보는 임시정부의 수상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2월 5일 호메이니는 이란에서 첫 번째 공식 회견을 개최하면서 ‘이란자유운동’의 지도자 바자르간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란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것은 보통 정부가 아니다. 이것은 이슬람법에 토대를 둔 정부이다. 이 정부에 대한 반대는 이슬람법을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정부에 대한 반항은 신에 대한 반항이다. 신에 대한 반항은 곧 모독이다.” 호메이니의 귀국은 이슬람혁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서 지지기반을 점차 확대시켜 나갔고 정권 이양을 위한 다음 행보를 단계별로 밟아나갔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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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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