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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1 17:20 수정 : 2008.07.14 16:33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9. 호메이니의 망명 생활 - 이라크

1973년 3월 모함마드 레자 샤는 기존의 양당제를 해체하고 단일 정당제로 전환시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하였다. 기존의 민족주의(Melliyun) 정당과 국민(Mardom) 정당은 여당과 야당으로 존재한 어용 정당에 불과했지만 형식적인 의회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함마드 레자 샤는 새로운 정당 부활당(Rastakhiz)을 창설해 모든 이란 국민들을 당원으로 가입시켰고 이를 통해 자신의 철권통치를 강화시켰다. 1976년 모함마드 레자 샤는 이슬람력 대신에 페르시아제국의 기원으로 바꾸었고 이란의 달력은 1355년에서 2535년으로 공표되었다.

호메이니는 팔레비 체제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고 새로운 달력의 사용을 반대했다. 그는 부활당이 이슬람에 반할 뿐만 아니라 헌법과 국제법의 기준에 위배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란국민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또한 그는 ‘투쟁하는 성직자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결성하면서 반샤 저항운동을 지휘했다. 1976년 6월 콤 신학생들은 1963년 봉기 13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팔레비는 특공대원과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공격했고 3일간 지속된 시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호메이니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이 임박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아랍에서는 10월 전쟁, 이스라엘에서는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 초반 아랍의 우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0월 16일 아랍국가들은 정전을 제의했지만 이스라엘이 거부하자 20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발표하면서 자원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세계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10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유엔긴급군의 파견을 결정했고 11월 11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휴전협정으로 전쟁은 끝났다. 제1차 오일쇼크 이후 미국은 이란을 강력한 우방국으로 규정하면서 양국사이에는 혈맹관계가 형성되었다. CIA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총석유수입량 가운데 이란석유의 비율은 1973년 5.9%에서 1978년 9.1%로 증가했다. 또한 미국의 대이란수출량도 1973년에서 1978년 사이에 7배로 늘어났다. 이 기간동안 이란은 19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했다. ? ?시기 미국은 이란을 ‘중동의 헌병’이라고 불렀고 이란을 통해 중동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의 중동정책 변화에 따라 한국과 이란의 관계도 가까워졌다. 한국과 이란은 1962년10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967년 4월 1일 주이란 한국대사관, 1975년 8월 25일 주한 이란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77년 6월 17일 이란의 테헤란 시장이 서울을 방문해 테헤란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그 상징으로 지명교환에 합의했다. 현재 서울에 ‘테헤란로’가 있듯이 테헤란에는 ‘서울로’와 ‘서울공원’이 있다.

1977년 지미 카터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인권외교를 강조하였다.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그동안 묵인되었던 팔레비 왕정의 인권 탄압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개선을 요구했다. 그 시기 모함마드 레자 샤는 자신이 시인한 수감 중인 정치범의 수는 3,200명이라고 밝혔지만 해외기관에서는 25,000명에서 30,000명 정도로 추정했다. 1975년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은 “세계에서 어떠한 나라도 이란보다 더 나쁜 인권유린 행위를 저지른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나자프에서 호메이니

반샤 시위
그해 여름 반샤 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지미 카터의 인권외교는 이란의 자유주의 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국민전선, 자유운동, 작가협회와 변호사협회는 모함마드 레자 샤와 수상에게 헌법 수호와 인권 보호를 위한 공개서한을 보냈다. 호메이니는 이 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국이 이란에서 물질적 이득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의 명예를 버릴 것인지 아니면 부패한 팔레비 정권의 지지를 버리며 명예를 다시 얻을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1977년 10월 23일 호메이니의 개인적인 비극이 이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호메이니의 장남 모스타파가 이라크 나자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모스타파의 죽음을 사바크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했고 이 소식은 점차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26일 테헤란의 아르크(Ark) 사원에서는 아야톨라 모르테자 모타하리(Morteza Motahari; 1920-1979)의 주도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개최되었다. 이날 시위에서는 모스타파를 순교자로 표현했다.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거대한 재앙에 직면해 있고 개인적인 비극은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모르테자 모타하리는 이란의 대표적인 이슬람사상가이자 이슬람혁명 이론가였다. 그는 1920년 이란의 종교도시 마샤드에서 전통적인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콤 신학교에서 호메이니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까다롭고 어려운 이슬람의 교리를 알기 쉽게 정리해 이슬람의 대중화를 표방했고 이슬람의 부활을 강조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15인 혁명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5월 1일 이슬람급진파 포르칸(Forqan)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이란에서는 그의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서 5월 1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다.

11월 15일 모함마드 레자 샤는 미국을 방문해 지미 카터 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백악관 앞에서는 재미 이란학생회 주최로 반샤 집회가 열렸고 경찰과 충돌했다. 이란 텔레비전에서는 최루탄 가스로 인해 눈물 흘리는 모함마드 레자 샤의 모습이 그대로 생중계되었다. 또한 “독재자에게 죽음을!” “샤를 타도하라!”라는 다양한 구호가 들려왔고 이 광경은 테헤란에서 또다른 도화선이 되었다. 1977년 이란에서는 서서히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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