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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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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8. 반샤 저항운동의 새로운 출발
모함마드 레자 샤는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점차 국정운영에 자신감을 갖고 강력한 왕정체제를 추진하였다. 그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 위해 1971년 10월 11일 페르시아제국 건국 2500년 기념식을 페르세 폴리스(Perse Polis)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페르세 폴리스는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뜻이다. 페르시아(Persia)라는 용어는 이란남서부지역 파르스(Pars)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파르스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페르시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페르세 폴리스의 이란어 명칭은 타흐테 잠쉬드(Takht-e Jamshid)이고 그 의미는 ‘잠쉬드의 왕좌’이다. 잠쉬드 왕은 7백년 동안 통치했다는 이란의 전설적인 왕이다. 페르시아 제국을 이란에서는 아케메니아 제국(BC 550-BC 330)이라고 부른다. 아케메니아 제국은 인더스강-나일강, 흑해-카스피해-페르시아만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란 역사상 가장 방대한 지역을 통치한 제국이었다. 또한 아케메니아 제국은 다양한 종족을 통합하여 20개 구성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했다. 이란어로 ‘스탄(stan)’이라는 용어는 ‘땅’ 또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족의 땅, 카자흐스탄은 카작족의 땅,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족의 땅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페르시아라는 용어는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와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란(Iran)이라는 용어는 1935년 이란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독일의 나치 정부는 아리안족 혈통을 강조했고 독일대사관 직원이 레자 샤를 설득해서 나온 정치적인 용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란이라는 단어는 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Avesta)에서 나온 용어이다. "a-eer-ya-nem va-ee-jo"(the land of Aeers) 이 용어는 이란고원을 언급한 것이다. Aeers는 Er로 변했고 이후 Ir로 되었다. Er, Ir은 Noble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명사로는 ‘귀족’, 형용사로는 ‘귀족의, 고귀한’을 의미한다. An은 복수형 어미. IrAn이라는 의미는 ‘귀족들’을 뜻한다. 이에 따라 이란인들은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무궁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모함마드 레자 샤는 자신을 아케메니아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대왕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무덤에서 시작된 대규모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고 대부분의 물품이 프랑스에서 들어왔다. 심지어 귀빈들은 프랑스 음식으로 식사했고 프랑스 와인을 마시면서 건배를 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대통령 정책 특사로 이란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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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건국 2500년 기념식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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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테헤란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광장의 한 가운데 ‘왕의 탑’을 세웠다. 이 탑은 사산조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결합시켰고 정상에서는 알보르즈 산맥을 볼 수 있고 지하에는 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모함마드 레자 샤는 이 탑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79년 2월 1일 호메이니는 15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바로 이곳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를 개최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 탑의 명칭은 ‘자유의 탑’으로 바꾸었고 해마다 이곳에서 이슬람 혁명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반샤 저항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1년 2월 8일 무장한 13명의 젊은이들이 카스피해 부근 시아칼 마을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했다. ‘시아칼 사건’ 이후 팔레비 정권에 대항한 게릴라운동이 확산되었고 1977년 10월까지 341명의 무장게릴라 요원이 목숨을 잃었다. 341명 중 306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지식인 280명, 노동자 22명, 상점 주인 3명, 성직자 1명이었고 296명이 35세 이하로써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다. 이 시기에 두개의 게릴라 조직이 결성되었다. 한 조직은 이란의 마르크스운동을 주창한 페다야네 할크(Fedayan-e Khalq)이고 또다른 조직은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킨 무자헤디네 할크(Mujahedin-e Khalq)였다. 사실 두 조직은 1960년대 중반 비밀조직으로 결성되었으나 7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게릴라투쟁을 실시했다. 무자헤디네 할크는 테헤란대학교 이공학 계열 학생들이 중심이었고 페다야네 할크는 테헤란대학교 인문사회과학 계열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두 조직의 지도세력은 지식인과 대학생이었고 71년에서 77년 사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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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샤리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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