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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8 16:06 수정 : 2008.05.28 16:50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7. 호메이니의 망명 생활 - 이라크

1965년 10월 6일 호메이니는 터키에서 이라크의 나자프(Najaf)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13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나자프는 카르발라와 함께 시아파의 최대 순례지이자 제1대 이맘 알리의 사원이 있다. 이맘 알리 사원은 977년 처음으로 알리의 영묘 위에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1086년 셀죽조(Seljuk, 1038-1194)의 말리크 샤(Malik shah, 1072-1092)와 1501년 사파비조(Safavid, 1501-1722)의 이스마일 1세(1501-1524)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나자프는 바그다드 남쪽 16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자프는 아랍어 단어 나자파(Najafa)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물이 닿지 않는 계곡 중심부에 위치한 높은 땅’이라는 뜻이다. 무슬림의 전설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여기에 정착했고 이곳을 ‘평화의 계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 도시를 ‘뱀의 소굴’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자프로 보내진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샤가 호메이니를 나자프로 이주시킨 것은 몇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그가 시아파 신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터키 부르사에서 강제로 거주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샤는 이러한 반대를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 둘째, 나자프에는 아불 카심 호이(Abul Qassim Khoi, 1899-1992), 모흐센 하킴(Mohsen Hakim, 1889-1970)과 같은 권위있는 시아파 성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샤는 나자프에서 호메이니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어 그의 정치적 지도력도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호메이니와 하킴.

호메이니와 하킴의 첫 번째 만남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성직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우마이야조 칼리프 야지드에 대항해 순교했던 제3대 이맘 후세인의 투쟁성을 찬양했지만 하킴은 당시 침묵했던 제2대 이맘 하산의 실용주의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킴은 강한 어조로 정치 문제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우리는 행동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호메이니는 이 주장에 반박했다. “반종교적인 기준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자 칸은 종교와 상관없이 그런 행동을 자행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을 금지시켜야 했습니다. 현재 이란의 샤는 쿠란을 통해서 반이슬람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희생시켜야 합니다.” 호메이니는 하킴에게 만약 당신이 봉기를 명령하면 당신을 추종하겠다고 강조했다. 하킴은 미소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화는 두 성직자 사이의 정치적인 이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호메이니는 1970년 나자프 신학교에서 이슬람정부에 관해서 강의했다. 그 내용은 훗날 이슬람혁명이론으로 등장했고 현재 이란이슬람공화국의 통치이론이 되었다. 1971년 호메이니의 이 연설은『이슬람정부』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슬람에서 입법권은 신에게만 귀속된다. 신만이 유일한 입법자이며 인간은 어떠한 자도 법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이슬람법 이외의 어떠한 법도 집행할 수가 없다. 이슬람정부는 이슬람법에 의한 정부이다. 이슬람정부에서 주권은 신에게 귀속되고 이슬람법은 신의 명령이다. 이슬람법은 모든 개인과 정부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호메이니는 유일한 입법자를 신으로 보고 있고 이슬람법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나자프에서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진정한 이슬람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이슬람정부의 건설을 주장했다. “우리는 통일, 힘, 투쟁의 준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외국침략자의 희생이 되어온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전제적이고 사욕에 넘친 지배자들이 이슬람의 영역을 분할했다. 무슬림의 통일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들이 장악한 억압정부를 타도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정의로운 이슬람정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정부의 건설을 반제국주의, 반전제주의 투쟁으로 인식했다. 그는 외국세력과 결탁한 군주제를 대신해 이슬람법학자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을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은 “이슬랍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슬람법학자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호메이니는 이맘의 은폐기 동안 이슬람법학자를 이맘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호메이니는 진정한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 이전까지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과도기 형태로서 주장했다.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은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에 명시된 최고지도자의 지위와 역할을 통해 규정되어 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최고 정책결정 및 집행 감독, 헌법수호위원회 이슬람법학자 임명권, 대통령 인준권 및 해임권, 군통수권, 군사령관 임명권 등이 있다. 이슬람혁명 이후 1989년까지 호메이니가 최고지도자였고 호메이니 사후 현재는 하메네이가 이 지위에 있다. 아야톨라 호이는 이슬람혁명 직전까지 이 이론에 대해서 반대했다.

호메이니의 이론은 방문객 뿐만 아니라 성지순례를 위해 나자프를 찾아온 평범한 이란인들을 통해 이란으로 몰래 숨겨서 들어갔다. 또한 이란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논평한 호메이니의 편지와 성명서도 같은 경로를 통해 이란으로 전달되었다. 비록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있었지만 그의 사상과 이론은 이란 곳곳에서 퍼지게 되었다. 호메이니의 이라크 망명생활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호메이니는 새로운 이론체계를 정립해 이란의 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탄생시켰다. /유달승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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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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