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06 11:52
수정 : 2008.05.06 11:52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5. 호메이니의 체포와 석방 그리고 추방
호메이니가 체포된 지 몇 시간 뒤 콤의 사원과 거리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다. 시위가 점차 확산되자 테헤란에서는 군대가 도착했다. 일렬로 정렬한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발사자세를 취했다. 군지휘관은 확성기에 대고 크게 외쳤다.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우리의 총알은 코르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짜 총알이다. 너희들에게 15분의 시간을 주겠다.” 콤의 도로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오후 3시경 콤의 상황은 종료되었다. 시위자들은 이날 수백명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22명이 사망했고 80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호메이니의 체포 소식은 ‘이슬람사회의 연합’을 통해 테헤란으로 알려졌다. 6월 5일 오전 9시 30분 샤 사원 앞에서 5천명의 젊은이들이 “호메이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고 관공서를 공격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병원에는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로 가득 찼다. 오후에는 테헤란 전역에서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시위가 나타났고 마샤드, 에스파한 및 쉬라지를 비롯한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야간통행 금지령을 발표했다. 경찰은 주요 성직자 30명을 포함한 320명을 체포했다.
1964년 4월 7일 호메이니는 체포된 지 열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호메이니의 귀환은 콤의 축제가 되었다. 페이지예 신학교에서는 그를 위해 3일 동안 축제를 개최했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호메이니의 집에 찾아왔다. 호메이니는 그들을 향해 이란의 주권과 사회정의를 주장하면서 샤를 공격했다.
1964년 10월 무함마드 레자 샤는 미군에 대한 외교 면책특권 법안과 군비강화를 위한 2억 달러 차관 신청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메이니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반동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미국에 대항해 싸워야 합니다. 세계의 자유 투사들은 우리들이 쓰러지지 않게 지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샤가 미국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정체제를 미국에 종속된 친미정권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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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대중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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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27일 예언자의 딸 파티마 탄생일을 맞이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콤 순례여행을 했다. 그들은 그날을 기리고 설교를 듣기 위해서 저명한 성직자의 집을 방문했다. 호메이니의 집에는 수많은 군중들로 가장 붐볐다. 오전 8시 30분 호메이니는 대중들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신에 속해 있고 그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슬픈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란은 더 이상 축제를 거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축제를 슬픔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팔았고 우리들의 독립을 팔았습니다. 미군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국가원수나 종교지도자를 살해해도 우리나라의 법으로 재판받지 않습니다. 의회가 이런 언어도단의 조치를 승인하다니 그런 어리석은 이치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당신들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미국인의 발 밑에서 떨고 있습니다.”
이날 호메이니의 연설은 이제까지 샤에 대항한 투쟁에서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호메이니가 이렇게 격분한 적을 본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호메이니는 이 법안이 이란의 독립과 주권을 양도했다고 비난하면서 찬성표를 던졌던 국회의원들을 반역자로 언급했다.
11월 4일 새벽 4시경 특공대원들은 콤에 있는 호메이니의 집을 급습하여 다시 그를 체포했다. 이번에는 감옥에 투옥하지 않고 테헤란의 메흐라바드(Mehrabad) 공항으로 끌고 가 여권을 주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터키로 가야 합니다. 당신의 가족은 곧 당신과 합류할 것입니다.” 테헤란 라디오에서는 이 소식을 간략하게 방송했다. “호메이니는 국민과 국가의 이익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주권에 반하는 선동과 행동으로 인해 해외로 추방되었습니다.”
샤가 호메이니를 투옥하기 보다는 해외로 추방시킨 결정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를 물리적으로 제거하기에는 또 다른 대중 봉기의 위협이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터키를 선택한 이유는 샤와 터키 사이에 존재하는 안보협력을 반영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터키를 시작으로 15년 동안 기나긴 망명생활이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샤의 의도 대로 되지는 않았다. 호메이니는 이란인들의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더욱 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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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 당하는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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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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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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