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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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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1. 팔레비의 공포정치
국민에 공포와 증오 불러 …‘백색혁명’ 근대화 추진시아파 종교지도자, ‘반이슬람·공포 정치’에 반기 1953년 쿠데타 이후 무함마드 레자 샤는 자신의 철권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주요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 통제를 실시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정보기관을 창설하여 정적 제거와 반대파 탄압을 시도했다. 1957년 무함마드 레자 샤는 미국 CIA의 도움으로 사바크(SAVAK)라는 새로운 정보기관을 창설했다. 이 기구를 운영했던 장교들은 CIA 본부에서 오리엔테이션까지 받았다. 사바크의 창설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반대파를 제거하여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투데당을 비롯한 좌파 계열의 조직망을 파악하여 반정부 인사 및 단체들을 탄압하였다. 둘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사바크를 통해 소련의 활동 정보를 취합하여 이란을 비롯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어하였다. 사바크는 무함마드 레자 샤의 직속 기관으로 사실상 그의 눈과 귀였고 이란 국민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명사였다. 사바크는 7,000여명이 넘는 전문 요원과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수의 시간제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다. 사바크는 불법적인 체포와 잔인한 고문을 통해 팔레비 왕정체제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드높였다. 사바크 창설 이후 이란은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 국가로 지목되었다. 매년 국제사면위원회는 사바크가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사바크를 통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현실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근대 국가에서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이란에 도입할 이유가 그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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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레자 샤를 반대하는 호메이니와 군중들.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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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제2차 중동전쟁 이후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중동 개입을 시작하였고 대소방어망 구축에 나섰다. 1959년 3월 미국과 이란은 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란에서 미군 주둔을 허용했다. 이 조약에서 미국은 이란의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1960년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과 이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무함마드 레자 샤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미국이 이란의 안전 보장을 수행하기 위해 이란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진보와의 동맹’을 위해 이란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했다. 1963년 무함마드 레자 샤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압력, 또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의미하는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을 단행했다. 백색혁명이란 피를 흘리지 않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의미한다. 백색혁명의 목적은 전근대적 토지 소유제도를 해체시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것이었다. 백색혁명은 토지개혁, 삼림 및 목초지의 국유화, 선거법 개혁 등 19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무엇보다 반왕정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963년 무함마드 레자 샤는 백색혁명의 비준을 위하여 국민투표를 요구하자 모든 성직자들이 그를 반대하여 정치에 개입하였다. 그들은 선언문을 작성하여 무함마드 레자 샤에게 보냈고 샤도 종교세력을 흑색반동분자라고 불렀다. 1963년 1월 24일 무함마드 레자 샤는 종교도시 콤(Qom)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성직자의 토지소유 증서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기생충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붉은 파괴’보다 훨씬 더 ‘검은 반동’을 질색한다.” 하지만 상인들은 성직자들을 지지하였고 항의의 표시로 3일동안 테헤란과 콤시장이 문을 닫았다. 무함마드 레자 샤에 대한 반대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저항운동’으로 등장했다. 잘랄 알레 아흐마드(Jalal Al-e Ahmad: 1923-1969)는 1962년 ‘서구중독증’(Gharbzadegi)이란 책을 출판했다. “나는 서구중독을 질병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마도 비구밋과 같은 곤충의 침입과 닮아 있다. 그들이 밀을 어떻게 공격하는지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안으로부터 공격한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가 나무에 남긴 것과 같이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는 이 책에서 1908년 입헌혁명 이후 이란지식인들이 서구 문화에 중독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전통으로의 복귀’ 운동과 ‘도덕으로의 복귀’ 운동을 주창했다. 또한 그는 서구 문화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를 성직자들이라고 지적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의 개혁 정책은 이란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권리를 향상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소수의 기득권층에게만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광범위한 반왕정 투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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