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27 14:45
수정 : 2007.12.27 16:43
|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6. 시아파의 도시
신학교 ‘하레즈’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곳
콤은 테헤란에서 남서쪽으로 약 15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종교도시이다. 이 도시는 시아파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센터이자 중요한 순례지이다. 이슬람의 역사는 단적으로 순니파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 이후 우마이야조(Umayyah, 661-750), 압바시야조(Abbasiyyah, 750-1258) 그리고 오스만 터키 제국(1300-1924) 모두 순니파 국가였다. 이에 따라 이슬람세계에서는 순니파를 다수파, 시아파를 소수파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란이 시아파 국가로 등장한 요인 중에 하나는 바로 콤이 있었다.
콤은 우마이야조 시대부터 순니파에 대한 저항의 도시로 출발했다. 그당시 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우마이야조에 반대하는 시아파 추종자들이 점차 이곳으로 와 정착했다. 645년 제1대 이맘 알리의 측근 아부 무사 아샤리(Abu Musa Ashari)의 이주를 시작으로 해서 반(反)우마이야조 인사들이 모여들었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도 이들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콤은 조로아스터교 도시에서 점차 시아파 도시로 변화되었다.
816년 제8대 이맘 레자의 여동생 파티마가 콤에서 사망했고 제9대 이맘 무함마드 알 자와드(Muhammad al-Jawad)의 세 딸도 이곳에 묻혔다. 17세기 사파비조 왕들은 파티마의 무덤 위에 황금 지붕을 씌운 사원을 지었고 이후 콤은 중요한 시아파 순례지가 되었다. 16세기 사파비조는 이란에서 최초의 시아파 국가였고 이를 통해 순니파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시아파의 섬이 되었다. 사파비조의 왕들은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의 나자프와 카르발라 대신에 콤을 방문했다. 이란인들은 사파비조를 통해서 아랍인의 침입 이후 약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조를 다시 열게 되었다. 과거 사산조(224-641)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지정하였고 조로아스터교 승려를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정교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였다. 사산조의 아르다쉬르 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대가 없는 모든 것은 지속할 수 없고 수호자가 없는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
17세기 사파비조 왕들은 파티마 무덤에 황금 지붕을 씌운 사원을 지었다.
|
사파비조는 사산조의 방식으로 단일한 시아파 신앙을 통해서 이란의 자주성을 복구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그 시기 사파비조의 주요 정적이었던 오스만 터키제국은 순니파였다. 사파비조는 순니파와의 전쟁을 통해서 이란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사파비조는 시아파를 통해서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이란 전역에 사원을 증축하면서 시아파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사파비조는 결코 종교기구에 대한 독립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파비조의 왕들은 사드르(Sadr)라고 불리는 성직자의 대표를 직접 임명했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교체하면서 시아파 성직자들을 국가기구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이 시기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시아파에서는 전통적으로 성직자들이 신자들로부터 직접 종교세를 거두었다. 사파비조의 왕들은 이러한 전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정부의 후원 아래 성직자들은 경제적인 독립성을 가졌다.
|
콤에 있는 호메이니의 집
|
시아파에서 신학교는 전통적으로 유명한 성직자에 의해서 종교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학교의 운영은 자선기금과 종교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전통적으로 신학교의 교육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기초 과정이고 이 시기에는 아랍어와 아랍문학, 이란문학, 이슬람역사, 쿠란 등에 대해서 배운다. 신학생들은 시험도 보지 않았고 유명한 성직자의 견해에 따라 성직자 복장을 착용하게 된다. 기초 과정은 일반적으로 약 4년 정도 걸리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학교 수업이 학기제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재를 완전히 습득해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콤에 있는 마수메 사원
|
두 번째는 하레즈(Kharej) 과정이다. 하레즈는 외부 또는 밖이란 용어인데, 이 과정에서는 신학생들이 원하는 스승을 직접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이 과정에는 이슬람 율법, 철학, 논리학, 신학에 대해서 배운다. 일반적으로 마드라사(Madrasa)는 기초 과정이고 호제예 엘미에(Houze-e Elmiye: 종교학 센터)는 하레즈 과정이다. 신학생들은 지방에 있는 마드라사에서 기초과정을 마친 후 콤, 나자프, 에스파한, 타브리즈 및 마샤드와 같은 종교도시로 가서 연구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호자톨에스람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콤 호제예 엘미에는 이란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1981년부터 신학교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경제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및 심리학과 같은 전공분야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산하 연구소에서 운영되고 있다. 현재 이란의 전국적인 신학생 수는 정확한 통계수치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콤의 신학생 수는 약 2만 명 정도이고 이중 150여명이 여학생이다.
1979년 이슬람혁명은 한순간에 나타난 사건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한 단계, 한 단계 진행되어온 이란 역사의 결과물이다. 성직자들은 16세기 사파비조에서 경제적인 독립성을 획득했고 19세기 카자르조 시대에서는 무기력하고 부패한 왕을 대신해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적인 독립성을 얻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확보한 성직자들은 이제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어났고 그것은 이슬람공화국의 수립으로 나타났다.
[알림] 주 1회 연재되어온 `유달승 교수의 중동이야기'는 유 교수의 이란 장기출장으로 인해 2008년 2월 이후 재개됩니다.
|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