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1 19:45
수정 : 2018.05.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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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탁 흥국생명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의장이 11일 오전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본사 앞에서 해고자 복직을 촉구하며 1만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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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세상속으로]흥국생명 해고노동자 단식 1만배
직원수 3400명에서 500명으로 줄고 노조 와해
해고자들 패소…“사쪽이 전관예우 활용” 반발
힘든 걸 이겨내기 위함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처지를 곱씹어서인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을 엎드려 절하고 또 절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본사 앞, 서울의 명물이라는 ‘해머링 맨’이 서 있는 곳. 전국생명보험노동조합 흥국생명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김형탁(47) 의장이 지난 8일부터 ‘단식 1만 배’를 하고 있다. 해고자와 다른 생명보험노조 간부가 108배로 때때로 합류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화’를 말하지만 이 땅의 노동자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굴종을 강요당할 뿐. 이를 거부하고 언감생심 사회정의나 노사균형을 요구했다가는 단식, 고공농성, 삼보일배를 해야 한다. 절박함에 무뎌진 탓인가,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단식하며 1만 번 절을 하는 이유다. 묵주를 든 그의 손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반복되는 두 개의 동작이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높이 22m, 무게 50t인 해머링 맨이 망치질을 하는 한 편에서 한 인간이 낮게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다. 노동의 신성함을 상징한다는 해머링 맨, 그러나 그것은 쉼 없이 일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노동자의 처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그 망치질은 마치 노동자의 목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흥국생명은 ‘일자리 창출’이 아닌 ‘일자리 죽이기’의 외길을 갔다. 1998년에 3400명이던 직원은 2004년 이후 500명 미만으로 줄었다. 노동조합 간부는 해고 대상 ‘0순위’다. 한 간부는 해고-복직-해고-복직-해고라는 기록을 세웠다. 기어이 흥국생명의 사용자는 정리해고와 노조 와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듯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희망퇴직을 유도한 뒤 정리해고를 단행해 노조의 반발과 파업을 유도한다. 이 땅의 파업은 곧 불법 파업이다. 간부들이 구속되거나 해고되면서 노조는 길고도 힘든 법정 투쟁을 벌여야 하고, 조합원들은 일신무사에 길들여지고 노조는 와해된다.
해고자들은 법정 다툼에서도 졌다. 근로기준법은 해고 요건으로 사용자에게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른 대상자 선정 △노동조합과 성실한 협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해고 요건에 대한 사법부의 해석은, 노동자 파업에 가차 없이 불법을 때리는 방식과 달랐다. 가령 서울지방법원(서형주 판사)과 서울고등법원(박삼봉·곽병훈·김춘호 판사)의 판결문에는 다음 문장이 똑같이 나온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는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지 않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하여 ….” 내 짧은 상식으로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가 없는 기업은 이 세상에 없다. 흥국생명은 계속 수백억원의 흑자를 냈다. 대법원은 ‘심리 불속행’이라며 노동자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흥국생명이 해당 법원 법관 출신을 변호사로 선임하고 김앤장 법률사무소까지 동원하면서 ‘전관예우’를 활용했다”는 해고자들의 주장이, 재판에서 패배한 자의 울분에 찬 항변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점심 시간, 빌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감시자들은 빌딩 창 안쪽에서 여전히 서성댔고 해고 노동자와 안면이 있는 직원들은 뒷문을 이용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김형탁씨는 연신 절하고 해머링 맨은 연신 망치질을 한다.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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