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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09 21:33 수정 : 2007.10.09 21:46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델타 지역의 한 유정공장에서 24시간 내내 천연가스를 태우고 있다. 니제르델타/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⑧ 축복과 저주의 두 얼굴-나이지리아

석유매장지 니제르 델타
생존위기에 학살까지
청년들 환경·인권운동 활발

나이지리아
“석유가 나면 우리도 부자가 되는구나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순진했죠.”

세실리아스 조르그(50)는 날마다 10시간씩 얌(마와 비슷한 덩굴성 식물)을 캐는 품을 판다. 얼굴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고, 깡마른 몸은 막대기처럼 단단하다. 하루 벌이는 한국 돈으로 1000원도 되지 않는다.

조르그를 비롯한 이곳 주민들은 나이지리아 뿐아니라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대한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가 사는 우무에쳄 마을은 세계 최대 석유 매장지의 하나인 니제르 델타 유전지역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보니라이트’ 원유는 황 함유량이 낮아 정제할 필요조차 거의 없는 최고급 원유로 꼽힌다.

이들을 가난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석유다. 마을 사람들은 1958년 석유가 발견된 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조르그는 “송유관에서 석유가 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어요. 개울에 기름이 돌며 물고기가 사라졌고요”라고 말했다. 마을 하늘 한쪽은 유정에서 태우는 천연가스의 불길로 1년 내내 타오른다. 불길이 내뿜는 열기와 매연으로 마을을 에워싼 숲도 서서히 사라졌다.

우무에쳄 사람들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석유 산업에서 나온 수익을 독점하고, 땅 주인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은 토지법 때문이다.

1990년 11월, 가난과 오염에 지친 우무에쳄 사람들은 다국적기업 쉘과 나이지리아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유정 앞에서 생계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했지만, 정부군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며 전쟁으로 변했다.


나이지리아 석유생산과 소비현황
“그들은 여자나 어린이한테도 총을 겨눴어요. 우리 남편도 그때 죽었고요.” 조르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학살 뒤 나온 정부 조사단의 공식 보고서조차 “주민들의 삶이 유전으로 심각히 파괴됐다”고 지적하며 시위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현지말로 ‘평화의 마을’을 뜻하는 이곳의 학살로 모두 80명이 목숨을 잃었고 집 500여채가 잿더미로 변했다.

17년이 지난 2007년, 우무에쳄은 여전한 가난에 시달린다. 원유값은 그새 갑절 이상 올랐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기는커녕 깨끗한 마실 물조차 없다. 1만명이 사는 마을과 주변 지역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나 중·고등학교 한 곳도 없다. 일자리가 없어 똑똑한 청년들도 무장 반군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우무에쳄은 세계 8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모순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 페스투스 케야무는 북부 하우자족이 정권을 장악해, 석유가 나는 남부의 이조족들을 자원에서 소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조족인 그는 “기독교 신자가 대부분인 이조족과 무슬림인 하우자족 등 독립 이전 한 나라로 살아본 적이 없는 250개 부족을 억지로 묶은 게 나이지리아”라고 주장했다.

정치 평론가 요가마 엔주마는 “나이지리아는 자원 부국이어서 민주주의가 더욱 꽃피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금화가 쉬운 석유라는 막대한 부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국민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지리아의 경제는 석유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다른 산업의 성장이 억제돼 왔다. 석유가 ‘검은 저주’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나이지리아 최대 유전지대인 니제르 델타 지역 시민단체의 포스터. 흘러든 기름 때문에 바다가 어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돼 있다. 우무에쳄/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라고스의 나이지리아 국립대학에서 학생들이 모여 음악 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설적인 음악가 펠라 쿠티를 음악적 스승으로 생각한다. 라고스/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는 유례없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출범한 우마루 야라두아 정부가 사상 최초로 이조족 출신 조나산 굿럭을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무장 반군 사령관 도쿠보 아사리를 석방하는 등 니제르 델타 지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은 또 세금·선거제도 정비와 부패 척결을 선포하며 나름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학살 뒤 10년 넘게 침묵을 지켜온 우무에쳄 주민들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과 외국 시민단체들의 연대로 환경·인권운동이 활성화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총기를 들고 분리 독립을 주장하거나, 외국인들을 납치해 돈을 버는 무장단체들의 힘이 더 세지만, 무장단체들의 활동에 미래가 없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우무에쳄 환경인권개발센터(CEHRD)의 간사인 전직 탐사보도 기자 패트릭 나그반톤은 민주화 운동으로 실형을 산 뒤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단체는 △석유로 인한 환경오염과 소형총기 실태조사 △에이즈 퇴치 운동 △유권자 교육운동 등을 벌여왔다. 나그반톤은 “니제르 델타에는 여전히 비폭력보다는 폭력, 이성보다 신을 믿는 이들이 더 많다”며 “하지만 국민들의 자긍심과 역량 향상만이 석유의 저주를 석유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무에쳄·포트하코트(나이지리아)/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펠라 쿠티의 멈추지 않는 노래

민중 삶 대변한 ‘음악 대통령’
만독재·반자본주의로 대중적 사랑

펠라 쿠티
“그들은 모두 기자의 친구, 위원장의 친구, 비서의 친구, 장관의 친구, 대통령의 친구라네. 절도에 부패, 물가인상과 혼란, 억압이 그들의 일. 마치 오바산조와 아비올라처럼. 그들은 국제적인 도둑, 도둑이라네.” (펠라 쿠티, ‘인터내셔널 시프 시프’(International Thief Thief))

제국주의와 독재, 부패에 시달려온 나이지리아는 이런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레 소잉카부터 오고니족 투쟁으로 유명한 시인 켄 사로위와, 탈식민지 문학의 거장인 치누와 아체베는 모두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펠라 쿠티다. ‘아프로비트’의 창시자로도 유명한 펠라 쿠티의 삶은 군부독재에 맞선 나이지리아 민중의 처절한 투쟁과 그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38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펠라는 유학을 떠난 1950년대 후반 영국에서 밴드를 결성했다. 60년대 영국과 나이지리아,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검은팬더당’ 등 흑인 민권운동에 눈을 뜨며 더욱 급진화된다. 사회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지지자였던 그의 노래는 국민들을 헐벗게 만드는 독재와 자본주의 비판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택 겸 스튜디오를 ‘칼라쿠타 공화국’이라고 선포하며 자유롭게 마약을 하고, 삶을 즐겼다. 그의 콘서트마다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그의 거침없음과 대중적 영향력은 펠라를 정권의 최대 눈엣가시로 만들었다. 77년 군부를 겨냥한 앨범 <좀비>가 대성공을 거둔 뒤 찾아온 군인들은 그의 어머니를 발코니 밖으로 던져 살해했고, 칼라쿠타 공화국을 불태웠다. 가까스레 살아남은 펠라는 어머니의 관을 라고스 군부대 앞으로 보내며 이들을 비판하는 노래 두 곡을 작곡했다.

펠라는 무엇보다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된다. 그는 재즈와 아프리카 전통 비트를 결합한 ‘아프로비트’라는 새 음악 장르를 창시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노래가 이해되도록,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피진 영어’를 쓴 펠라의 음악은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이 됐다.

펠라가 97년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뜬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팬들의 사랑은 여전히 뜨겁다. 사람들은 펠라의 음악이 단순히 음악을 넘어 아프리카 사회 전체의 미래를 내다봤다며 그를 ‘예언자’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비비시>(BBC) 게시판에 한 미국인 팬은 “선구자이며 음악 천재였던 그의 음악은 오늘날도 전세계 모든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댓글을 남겨놨다.

라고스/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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