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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1 19:25 수정 : 2013.04.01 19:25

권태선 편집인

38년 전 자신의 죽음이 실족사가 아니었음을 알리려는 듯 유골로 모습을 드러냈던 장준하 선생이 지난 주말 다시 영면의 길로 떠났다. 선생의 마지막 길을 많은 사람들이 배웅했지만, 그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이고 현 정부와 새누리당 인사들도 찾기 어려웠다. 선생의 겨레장을 계기로 진실 규명을 통한 화해가 이뤄지기를 소망했던 사람들에겐 실망스런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쪽에서는 진실 규명이 하등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선생의 죽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재조사로 그 추정이 사실로 확인되는 날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꼭 그럴까?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민대통합을 소리 높여 외쳤다. 야당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고, 김지하 시인을 찾기도 했다. 당시 행보가 진정한 통합 노력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취임 후엔 그런 시늉조차 안 하고 있다. 대선 때 주장이 정치공학적 수사였을 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연유다. 취임 한 달 만에 40%대로 추락한 지지율은 이렇게 말로는 100% 대한민국을 되뇌면서 실제로는 극도로 편협한 세력에 기댄 그의 정치 행보에 대한 실망감의 반영이다.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비판세력을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 선생의 사인 규명은 바로 그런 노력의 징표로 환영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사회 분열의 연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민주진영 대 친일독재진영의 대립은 호남 대 영남이란 지역갈등과 연계돼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은 친일독재세력에 맞선 민족민주진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선생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앞장선다면 이는 아버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민족민주세력과의 불화를 끝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딸로서 아버지의 치부가 드러날지도 모르는 진실 규명을 결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아버지의 딸이기에 오히려 진실을 규명해 박정희와 장준하를 화해시키고, 분열과 대립 시대에서 화합의 미래로 이끌 책임이 있다.

이와 관련해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으로 인해 갈가리 찢겼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의 성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아공 진실위는 헌법에 근거한 법적 틀을 갖추고, 내 편 네 편을 막론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 저질러진 모든 인권침해를 조사 대상으로 삼되, 진실을 고백한 범죄자에게는 사면권을 부여한 특징을 가졌다. 이에 따라 인종차별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도,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위니 만델라(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전처)도 위원회에 출석해 자신들이 저지른 인권침해를 고백하고 사면을 받았다.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로 남아공 정부의 테러에 의해 눈과 팔을 잃었던 알비 삭스 전 헌법재판관은 범죄자들이 인권침해의 총체적 진실 규명에 협조한 데는 사면이란 유인요소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한다.

우리에게도 과거사정리위원회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처럼 진실위를 본뜬 조직이 있었으나 가해자들의 비협조로 제한적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장 선생 사건이 규명 불능으로 마무리된 것도 보안사나 국정원 등 관련 기관의 협조 거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골이란 새로운 타살 증거의 등장으로 이제는 진실 규명을 회피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를 박정희·장준하의 화해를 위한 기회로 적극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최고지도자 부인의 과오조차 화해의 법정에 올려놓았듯이, 박 대통령이 아버지 시대의 어두운 과거를 화해의 법정에 올린다면 그 자체로서 한국 사회는 대통합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상규명특별법을 만들어 관련 기관의 자료에 접근하게 하고, 증인에 대한 강제조사를 허용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가해자에 대한 사면 등, 통합과 화해를 위한 조처를 마련해도 좋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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