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28 19:32
수정 : 2012.11.2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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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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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요? 모르는데요. 김유신 시대 말인가요?” 지금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되고 있는 기록영화 <유신의 추억>에서 유신시대를 아느냐는 질문에 한 젊은이가 내놓은 반응이다. 그만이 아니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젊은이 가운데 누구 하나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헌정을 중단시키고 긴급조치로 나라 전체를 병영국가로 만들면서 종신집권을 꾀했던 40년 전의 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공식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유신은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그제 부산 유세에서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세력의 잔재를 대표하는 박근혜 후보가 독재를 찬양하고 미화한 역사인식으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느냐”고 박근혜 후보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쪽은 이미 지난 9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사과했다며, 문 후보 쪽이 30년도 더 지난 과거사를 끄집어내 선거에 이용하려 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런데 정녕 유신은 지나간 과거이기만 한가? 박 후보의 선거 유세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박 후보는 대전 유세에서 “지금 야당의 후보는 스스로를 폐족이라 불렀던 실패한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였다. 정권을 잡자마자 국가보안법 폐기하겠다, 사학법을 개정하겠다며 이념투쟁으로 날밤을 지새웠다”고 목청을 높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등 4대 악법 개정 노력을 지칭한 것이다. 당시 당 대표로서 이들 법안 개정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박 후보가 내세운 논리는 ‘국가정체성 수호’였다.
그는 부패 사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학 이사회 3분의 1을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에서 추천하게 하고 학운위와 대학평의원회를 심의기구화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한 사학법 개정안을 두고, “체제를 뒤흔드는 법안으로, 반미·친북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비리사학이 정상화되면 국가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였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그의 ‘국가’가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또 어떤가? 박정희 유신체제는 긴급조치와 보안법으로 버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수기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와 비판을 금지한 긴급조치 아래서 툭하면 보안법을 적용하는 통에 ‘막걸리 보안법’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민주화가 된 나라에서 이런 보안법의 폐지 또는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원외투쟁까지 불사하며 극력 반대했다.
돌이켜보면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이념투쟁으로 날밤을 새운 것은 오히려 박 후보 쪽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언론·집회·사상의 자유를 위시한 개인의 기본권 존중에 있다. 하지만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친북 좌파’로 몰았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도 상대 후보의 북방한계선 발언을 호도하며 색깔을 덧씌우려 하고 있다. 이러니 박 후보의 유신 등에 대한 사과가 진정성 있게 다가올 리가 없다.
개인의 기본권 문제는 국민총화를 내세우며 치마 길이와 머리 길이까지 단속했던 유신이 훼손한 헌법 가치 가운데 중요한 하나였다. 박 후보가 보안법과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며 내세운 국가정체성 논리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기본권을 유보할 수 있다는 국가주의 냄새가 풀풀 난다.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자 주요 20개국의 일원임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을 정도로 민도가 높아진 국민들을 낡은 국가주의로 옥죄려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어도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젊은이들이 유신이란 말을 알고 모르고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학교폭력의 진원지인 일진문화나 단체회식에서 폭탄주를 들어올리며 일사불란하게 ‘위하여’를 외치는 것처럼, 시대착오적 국가주의의 유령이 여전히 활보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발본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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