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24 19:31
수정 : 2012.10.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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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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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성운동가들이 교본처럼 여기는 <델마와 루이스>의 지나 데이비스와 저녁을 할 기회가 있었다. 델마 역에 이어, 드라마 <최고사령관>에서 갖은 노력 끝에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을 통과시키는 미국의 여성 대통령으로 분했던 데이비스는 실제로도 성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다.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연구소를 만들어 어린이용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성평등 문제를 연구할 정도다. 그렇다 보니 그날 모임에선 유력한 여성 후보가 나선 한국 대선도 당연히 화제에 올랐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의 지위가 개선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근혜와 여성 이야기가 나오면 2000년대 초반 한 후배의 ‘박근혜를 사유하자’는 글로 촉발됐던 논쟁이 떠오른다. ‘박근혜의 여성’에 주목한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같은 여성인지라 박 후보가 공감·배려·소통 등 여성 리더십의 장점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21일 정수장학회 회견은 그런 바람이 헛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피해자 김지태씨를 부정축재자로 매도했고, 구금당한 상태에서 겁박당해 재산을 넘겨준 것을 ‘헌납’이었다고 강변하며 국가폭력을 사실상 용인했다.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커녕 일말의 배려도 없었다. 기자회견 내용은 당 공식기구는 물론이고 측근의원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것이었음도 확인됐다. 국민과의 소통은커녕 당내 소통조차 못하는 불통 정치인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과 여성적 리더십이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시켜준 회견은 박 후보의 학습능력에 대한 의문도 불러일으켰다. 그는 김지태씨 유족의 장학회 반환 소송에 대해 법원이 (재산 ‘헌납’을) “강압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걸로 안다”고 했다가 바로잡는 소동을 벌였다. 법원이 강압은 인정하면서도 시효 소멸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는 내용은 이미 여러 번 보도됐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을 많은 이들은 그의 불통과 무지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이 있으니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가, 재심 결정이 법원의 최종판단이라는 사법체계의 기본도 모르는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고서야 재심 결정을 존중한다고 후퇴했다. 이렇게 자신과 관련해 오랫동안 문제가 돼왔던 사안에 대해 사실관계조차 틀리는 이야기를 하는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단순히 그의 무지 탓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이를, 박 후보가 “‘아버지의 대한민국’이란 미분화된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로 인식해온 그에게는 아버지가 정리하고 합리화했던 틀을 넘어 세상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합리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박정희 시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나 판결이 나와도 그것은 스쳐 지나갈 뿐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박 후보가 지난달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 사과는 진정성이 있는 걸까. 당시 박 후보는 자신이 그동안 구국의 결단 등으로 규정했던 5·16이나 유신에 대한 평가를 바꾼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정치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 아버지 박정희의 신원임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제 그 최종 목표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긴 했지만, 그의 진심은 여전히 ‘구국의 결단’ 쪽에 가 있었을 터이니. 정수장학회 회견은 잠시 감춰뒀던 그의 진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 회견을 본 새누리당의 한 인사는 ‘실망보다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를 겪은 이들은 걱정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국민총화를 부르짖으며 국가폭력을 휘둘렀던 박정희의 망령이 다시 배회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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