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12.18 18:43 수정 : 2007.12.19 09:56

권태선 편집인

권태선칼럼

“국민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입으로 비비케이(BBK) 설립 사실을 밝힌 광운대 동영상이 공개돼 논란이 된 뒤 이명박 후보가 17일 도하 각 신문에 낸 광고 문구를 보며 두 사람의 미국 정치 지도자가 떠올랐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다 결국 거짓임이 밝혀져 중도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그 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결정으로 2000년 대선에서 승리를 빼앗겼던 앨 고어 전 부통령이다.

1972년 6월18일, <워싱턴포스트> 1면 한 귀퉁이에는 ‘민주당 사무실 도청 기도자 5명 체포’란 조그만 기사가 실렸다. 2년 뒤 닉슨의 사임을 몰고온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발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젊은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사 기자들은 이들 5명이 좀도둑들이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를 믿고 물러섰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닉슨은 그해 11월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백악관은 당시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마이어 그레이엄이 위협을 느꼈다고 회고할 정도로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두고 편파적이며 상황을 오도하고 있다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협박에 굴하지 않은 워싱턴포스트의 끈질긴 보도로 이들의 행위가 닉슨 선거운동본부와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특별검사가 임명되고 2년여 수사를 통해 닉슨의 비서실장 등 7명이 기소됐다. 닉슨은 “잘못은 있지만 불법행위는 없었다”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법정 공방 끝에 제출된 테이프에서 그가 사건 초기부터 은폐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확인돼 탄핵 위기에 몰렸다. 결국 그는 스스로 물러나는 쪽을 택했고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을 여러분이 미워하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지 않는 한, 그들이 여러분을 이길 수는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치욕이 자신에게서 비롯됐음을 인정하고 74년 8월8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20여년 후인 2000년 12월13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 고어 부통령은 선거 패배를 선언했다. 플로리다주에서 투개표 과정의 부정 등 많은 문제점이 밝혀져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재검표가 진행되는 도중이었지만 연방대법원은 이를 위헌이라며 그 중단을 명령했다. 고어는 대법원의 결정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지만,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우리의 단결과 우리 민주주의의 힘을 위해 양보한다”고 밝히며 결정에 승복했다. 국민들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날의 아픈 결정 이후 그는 더 큰 대의를 위해 나섰다. 인류를 위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예언자가 된 그는 <불편한 진실>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이제 그는 미국의 정치 지도자를 넘어 세계의 지도자로 우뚝 선 것이다.

2007년 12월19일.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유력 정당의 대선후보가 특검 대상이 된 상태에서 선거를 맞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이도, 지지하지 않는 이도 마음이 착잡하긴 마찬가지다. 이 후보가 당선될 경우, 특검이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이 후보의 말을 입증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의 상황을 빚어낸 이 후보와 정치권이 야속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탓만 할 수는 없다. 우리도 이 나라에 공동 책임이 있는 탓이다. 이제 책임있는 유권자로서 최종 선택을 함에서, 자신의 덫에 갇혀 스스로를 파멸시킨 닉슨이 아니라, 자신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했던 고어의 정신을 상기해 보는 건 어떠한가?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 여러분의 선택이 ‘대한민국 5년’을 바꿉니다
▶ 동영상이 움직인 표심의 향배는?
▶ 전화로 문자로 ‘투표 참여’ 막판 호소
▶ 정치열기 높은 수도권 30~40대의 선택은?
▶ 유권자 흥행 실패, ‘그들만의 잔치’
▶ 특검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 [강남 재건축 시장 가보니] 대선 뒤 들썩? “글쎄요 잘해야…”
▶ [권태선칼럼] 닉슨, 고어 그리고 이명박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권태선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