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17 17:59
수정 : 2007.07.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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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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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칼럼
최근 한국 보수언론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행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사르코지는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 만능주의자다. 한 신문을 보면, 그는 ‘프랑스 혁명하듯 교육개조’에 나서고 있고, 프랑스 학부모들은 “경쟁을 강조하는 사르코지식 교육개혁만이 프랑스의 살 길”이라고 환호한다고 보도한다. 그의 정책은 경쟁이 국력의 요체라는 믿음의 구현으로 설명되고 그는 대처나 레이건에 비교된다.
그러나 서방언론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사르코지의 교육개혁을 다룬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사 제목은 ‘필요하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개혁’이었다. 그의 교육개혁 내용은 대학에 예산 집행과 교수 임용 등에 대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기부금 조성을 허용하는 정도다. 학비와 학생 선발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역시 대학교육에 동등한 접근 기회를 허용해야 한다는 프랑스 교육의 기본철학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바칼로레아만 통과하면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학비가 전혀 없고 165유로(약 20만원)의 학부 등록금만 내면 된다.
경쟁에 대한 사르코지의 생각 역시 한국 언론이 전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가 유럽연합의 새 개혁조약에서, 유럽연합이 지난 50년 동안 견지해 온 “자유롭고 왜곡되지 않는 경쟁”이란 내용을 삭제하자고 주장했던 것은 유명하다. 2일 스트라스부르 연설에서도 경쟁을 유럽연합 정체성의 지주로 여겨선 안 되며, 시장의 독재에 복종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사르코지가 경쟁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가 말하는 경쟁과 그 경쟁이 적용될 프랑스 사회라는 문맥은 한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경쟁의 부족이 문제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침이 문제고,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경쟁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 게 문제다.
한국의 초·중등학교에서 교육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됐다.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아이들을 앞세워 온 가족이 벌이는 처절한 싸움만 남았다. 대학은 또 어떤가? 교육철학이 없는 우리 대학에선 국제표준이란 이름으로 강요되는 국제적인 대학평가 기준이 금과옥조인 양 신봉된다. 교수들은 과학논문색인(SCI) 또는 사회과학논문색인(SSCI)급 학술지에 논문게재 등 연구업적 압박에 시달리고, 중문과 교수까지 영어 강의를 강요당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수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울의 한 주요 대학 조사에선 대다수 교수가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특히 이공계열 조교수들은 5점 만점에 평균 5점의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교수들이 학생 교육에 충분한 관심을 쏟기 어려울 것은 짐작기 어렵지 않다. 또 대다수 학생에게 대학은 좀더 안정된 직장을 찾기 위한 통과역일 뿐이어서 그들의 관심은 취업에 필요한 학점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니 대학에서 무슨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한국 교육을 이대로 방치해도 될까? 지금과 같은 맹목의 경쟁 시스템이 한국 교육, 나아가 한국 사회를 위해 여전히 최선인가? 국민적 대토론이 급박한 시점이다. 토론을 위해 미국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명문인 세인트존스대학의 크리스토퍼 넬슨 총장의 말을 들어보자.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일하는 것이다. 대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과 세계 속에 그들의 위치를 알게 해 가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것이 좋은 일자리와 괜찮은 월급, 전지구화한 시장에의 기여 따위보다 소중하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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