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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29 21:47 수정 : 2007.08.30 14:14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박해미의 오케이클리닉
월권에다 바보 같은 집착이에요

Q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25살 남성입니다. 저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와 정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가치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통제하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아직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봤습니다. 물론 총각이고요. 친구들은 성욕을 못 참으면 집창촌 같은 데서 해결하기도 했다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혼자 해결(?)하고 말지 하면서 안 갔습니다. 저 나름대로 정절을 지킨다고 노력했지요.

그렇게 사랑과 특히 성에 대해 백년 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터라 남친 또는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상담 글만 봐도 화가 치밉니다. 최근에 좋아했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녀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활달한 성격입니다. 그녀와 어느 정도 친근한 사이로 발전하다가 너무 힘든 나머지 제가 연락을 끊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는 오늘도 모임에 나가서 남자를 만났겠지. 혹시 어떤 ‘놈팽이’가 집적댄 건 아닐까. 그녀의 과거는 어땠을까. 예전 남친을 많이 사랑했을까. 둘이 잠자리는 했겠지. 제기랄! 제 이성은 “그녀가 몇번 연애를 했든 누구와 잤든, 현재 내 연인이고 내가 사랑한다면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는데, 감성은 “어떻게 저런 망측한 여자와 사귈 수 있지? 그만 만나!” 하고 서로 싸웁니다.

요즘 저처럼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나 여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여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가 ‘열린’ 사고를 가지고 현실에 적응을 해야 하나요?

A
신뢰와 정절이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가치라고요?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신뢰와 정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신뢰와 정절을 지키지 않는 행동, 나쁜 짓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 ‘지금’ 사랑하는 사람인가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한테 정절을 지키고, 그에게 정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권리죠. 하지만 나와 함께하지 않았던 그의 과거에 대한 감정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월권입니다. 월권일뿐더러 하나 마나 한 고민입니다. 타임머신 타고 가서 상대방의 과거를 바꿔놓을 수도 없잖아요. 상대방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서, 과거가 못마땅해서 지금의 사랑을 포기하겠어요? 공부 안 하고 놀았던 시간이 속 상하다고 남아 있는 시험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여자친구의 활발한 성격이 못 미더워서, 그녀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서 골치를 앓느니 포기했다고요?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여자가 성적으로도 분방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연애를 못 해봤으니 그런 논리는 아마도 친구들이나 매스미디어나 책을 통해서 찾아냈겠지요. 저의 20대는 어땠을 것 같나요? 님이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이라면 저처럼 20대에도 튀고 활발했던 성격의 여자는 성적으로 자유롭고 수많은 남자와 어울렸을 것이라고 미뤄 짐작하겠죠?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시 님 못지않은 순결주의자였습니다. 순결을 바친 남자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육체적 순결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으로 바보 같고 무모한 선택을 했던 거죠. 그렇게 힘든 결혼생활을 어렵게 끝내고 한참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제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저는 남편이 저를 만나기 전 연애 경험이 많다는 걸 알고 결혼에 이르렀죠. 우리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건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상대방에게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또 과거에 겪었던 연애 경험이나 상처들이 나를 돌아보게 해주고 좀 더 성숙한 사랑을 다지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님께서도 언젠가 진실한 사랑을 만나 좋은 가정을 꾸리고 싶겠지요. 아버지의 통제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게 못했던 어머니가 행복했다고 생각하나요? 설마 새장 속의 새처럼 아내를 가둬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시기에 연애를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를 많이 사귀어 보라고 님의 등을 두드려 주고 싶네요.
박해미의 오케이클리닉 / 박미향 기자
이 여자가 진심으로 나만을 사랑할 것인지 아닌지를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본인의 경험과 시행착오만이 그 답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만나서 껍질 같은 인상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한다면 시행착오의 시간은 더 길어질 겁니다. 고시에 합격하고 참한 아가씨와 선봐서 결혼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여기서 참하다는 건 껍질 같은 인상이 참한 것뿐 그 속은 같이 오래 지내봐야 알 수 있겠죠. 어쨌든 원하는 게 거기까지라면 그것도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면 자신을 던져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고 상처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시험뿐 아니라 연애에서도 노력 없는 성취는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순결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나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제약을 두지 말고 거침없이 사랑하라고 당부하겠어요. 시작도 못한 일에 대해서 지레 두려움을 갖지 마세요. 본인이 가진 마음속의 문을 열지 못한다면 님만을 사랑하고 끝까지 신뢰를 쌓아나갈 파트너도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박해미 / 배우·뮤지컬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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