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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 차기테 마을엔 커피 농장이랄 것도 없는 자그마한 밭뙈기들이 절벽마다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세찬 바람과 깎아지른 경사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든 곳에 볼 빨간 아홉명의 생산자와 그 가족들이 커피를 기르고 있다. 차기테/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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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①차기테 마을 커피 농민
중남미·아프리카·아시아 커피 산지
10여년, 해마다 사개월 농장 돌며
다양한 생산자 만나 직거래
배달 사고 나도 로스팅할 때 설레며
커피 생산자와 그 가족들 떠올라
그 온기 담은 ‘얼굴 있는 커피’
온두라스 산꼭대기 차기테 마을
가난에 쫓겨온 볼 빨간 사람들
깎아지른 경사에서 커피 키워
그들이 마련한 세상 끝 마을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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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 차기테 마을엔 커피 농장이랄 것도 없는 자그마한 밭뙈기들이 절벽마다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세찬 바람과 깎아지른 경사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든 곳에 볼 빨간 아홉명의 생산자와 그 가족들이 커피를 기르고 있다. 차기테/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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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사꾼이다.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수확 철에 맞춰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커피 산지를 방문하고 살 만한 커피를 찾아 여러 농장을 돌아다닌다. 품질 좋은 커피를 싸게 사서 팔아야 이문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야심은 늘 실패했고 희망처럼 아직 잡힌 적이 없다. 그렇게 찾아다닌 파랑새를 결국 집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동화는 어릴 적 나를 무척이나 낙담시켰는데, 죽어라 찾으러 돌아다녀야 그제야 파랑새가 파랑새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동심파괴 동화.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늘 “물건 떼러 다닙니다” 겸손한 척 답하지만 나는 맛있는 커피를 싸게 사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십여년째 매해 사개월 넘는 시간을 커피 산지에서 떠돌고 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한 2000미터?” “진짜?” “가보자!”
꽤 많은 사람을 만난다. 커피 생산자와 그 가족들, 농장의 노동자들, 산지의 수출업자, 소비국의 수입업자, 여러 나라에서 온 커피 바이어, 품질 관리 담당자, 농학자, 커피 연구 기관의 연구원들, 트럭 운전사, 엔지니어, 수출입 관계자…. 이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마주한 후에야 맛있고 ‘비싼’ 커피가 내 앞에 도착한다. 어머나. 이렇게 커피 생두를 산지에서 직거래하는 방식을 업계 사람들은 보통 ‘다이렉트 트레이드’라고 부른다. 자신이 직접 원하는 생두를 고를 수 있고,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유통 과정을 줄여서 마진이 많이 남을 것 같지만 파랑새는 그리 쉽게 잡히지 않는다. 거금을 들여 파랑새 주문했는데 참새가 배달되는 경우를 비롯해 온갖 인생역정, 배달 참사가 곧잘 일어난다. 내가 주문한 커피와 다른 것 혹은 품질이 떨어지는 생두가 도착하는 경우다. 상대가 순순히 인정하면 생두를 교환하거나 환불받으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커피 장사가 아니라 결국 사람 장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도 산지에서 도착한 커피를 로스팅할 때면 늘 설렌다. 그 커피를 기른 생산자와 가족의 얼굴부터 떠오른다. 곧이어 그 커피를 만나고 가져오기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의 얼굴과 농장의 정경, 함께 했던 식사, 꼬불꼬불했던 비포장길에 흐르던 음악들까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가져온 커피를 좀 있어 보이기 위해 ‘얼굴 있는 커피’라고 한다. 처음에는 마케팅 전문가들이 장사하는 데 스토리텔링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해서 ‘사연 많은 커피’라고 하려고 했는데 직원들이 한심하다고 해서 포기했다. 어쨌든 시장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나는 그 익숙한 반응에 쉽게 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얼굴 있는 커피’가 실제로 보통 커피들과 다른 점이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제 나는 온두라스의 차기테(Chaguite) 지역에서 생산한 커피를 로스팅하며 그곳 사람들을 떠올렸고 그 얼굴들의 사연을 하나 꺼내볼까 한다.
차기테 마을의 생산자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3년 전 1700미터에 위치한 바냐데로스 농장에 갔는데, 뒤로 보이는 높은 산 정상부에 커피 밭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 온두라스 파트너, 로니한테 물어봤다. 로니는 거긴 고도가 너무 높아서 춥기 때문에 커피가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온두라스 커피 협회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생산자들과 긴밀하게 일했던 로니 의견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 바냐데로스 농장의 오틸리오가 저기 커피 밭 맞다고 했다.
“몇 미터인데?” “한 2000미터?” “진짜?” “나도 저기 가보지는 못했는데 엄청 가난한 사람들이 커피 기르는데 껍질 까는 기계(펄퍼)가 없어서 그냥 열매째로 넘긴다고 수집상에게 들었어.” “가보자!”
오프로드 수준의 드라이브 끝에 도달한 곳은 말 그대로 우뚝 솟은 산 정상 부근이었다. 산꼭대기 마을 이름은 차기테였다. 고도가 높다 보니 너무 추워서 이곳 사람들은 늘 볼과 코가 빨갛다고 한다. 눈부신 절경만큼이나 놀랐던 것은 척박하고 험준한 곳에, 농장이랄 것도 없는 자그마한 밭뙈기들이 절벽마다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광경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커피를 심었고, 어떻게 기르고 또 수확하려 하는지 유네스코에 신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세찬 바람과 깎아지른 경사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든 곳에 볼 빨간 아홉명의 생산자와 그 가족들이 커피를 기르고 있었다. 로니 말에 따르면 이곳은 온두라스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커피 농장들이었다. 그들은 가난에 쫓겨 하늘에 닿을 듯한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100달러도 안 하는 펄퍼를 아홉 가구가 못 사서 매년 턱없이 낮은 헐값에 커피 열매를 팔아넘기고 옥수수를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나는 중미 다른 곳에서도 펄퍼가 없어(심지어 빌릴 데도 없어) 커피 열매로 판매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펄퍼는 커피 열매 껍질을 까는 아주 간단한 기계 장치인데 커피 생산자가 펄퍼로 껍질을 제거한 다음 씨앗에 묻은 과육을 발효시키고 잘 씻어서 팔면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고 누구나 다 이렇게 한다. 이곳은 세상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의 아슬아슬한 터전이었다.
마을 농장 커피 전량 구매까지
커피 품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일부 스페셜티 커피(스페셜티 커피는 국제 기준의 관능평가 점수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받은 커피를 가리킨다. 대략 전세계 커피 생산량의 7% 정도가 스페셜티 커피 등급으로 거래되고 있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커피는 뉴욕 상품거래소에서 결정되는 국제 시세에 기반해서 거래가격이 결정된다. 현재 국제 커피 가격은 지난 십삼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세계 커피 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소농들의 평균 최저 생산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 가격의 1% 내외만이 커피 생산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많은 소농들은 생활비와 커피 생산에 필요한 최소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수집상이나 커피 수출업체로부터 커피 밭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데, 병충해나 이상기후 등으로 작황이 좋지 않아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결국 커피 밭을 빼앗기게 된다. 작년부터 미국으로 가기 위한 만여명의 난민 행렬을 가리키는 카라반의 시작이 온두라스였는데, 그 일부가 커피 밭을 잃고 쫓겨나거나 가난에 허덕이다 커피 농사를 결국 포기한 사람들이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차기테 마을은 어쩌면 그 낭떠러지 가까이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냉철한 장사꾼이므로 일단 커피 샘플을 요청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품질 평가를 했더니 아홉 샘플 중 세개가 아주 훌륭했다. 그해 처음으로 세명의 차기테 생산자로부터 커피를 구매했고 웬일인지 반응도 좋았다. 나는 높은 고도가 품질에 좋은 영향을 미쳤지만 나무의 영양 상태나 커피 열매를 생두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로 품질이 가구마다 고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로니는 이 마을에서 중장기 프로젝트를 함께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일단 펄퍼를 사서 설치하고 발효 탱크와 건조용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로니가 온두라스 커피협회 지원팀과 방문해 커피 재배, 비료, 가지치기, 수확, 가공까지 교육을 계속했다. 그 결과 작년에는 아홉개 농장 샘플이 모두 높은 점수가 나와서 나는 이 마을 커피를 전량 구매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커피 열매를 수집상에게 그대로 넘길 때보다 내가 거의 네배 높은 가격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차기테 마을을 방문한 것은 올해 봄이었다. 여전히 산 정상부까지 오르는 길은 몹시도 험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생산자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근처 농장들을 함께 돌아보며 고충과 문제점, 개선 방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커피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발효와 건조가 쉽지 않다. 발효에만 최소 32시간 이상 걸리는데 기온이 낮을 때는 48시간까지 길어지기도 한다.
커피 열매 가공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 보니 발효 중단 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발효가 완벽하게 처리되지 못하면 커피가 쉽게 썩는다. 낮은 기온 때문에 야외에서 건조가 쉽지 않아 건조용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는데, 들어가 보니 통풍이 좋지 않아 내부 온도가 너무 높고 어제 널어놓은 커피에서 벌써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발효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커피를 제대로 씻지 않고 사전 건조 없이 후끈한 비닐하우스에 두니 바로 쉰 거다. 발효 마무리 시점과 완벽한 세척, 실외 건조장에서의 사전 건조, 비닐하우스 통풍 개선 등을 얘기했다. 생산자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앞으로 발효와 건조 과정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해당 커피는 판매용에서 제외하겠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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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직거래로 네배의 수입을 올린 차기테 마을 주민들이 서필훈 대표를 환영하는 마을잔치를 열었다. 잠깐 뒤돌아서 눈을 감으라고 하고 선물한 그림에는 커피나무, 열매와 로스팅한 원두 사이에 서 대표가 있었다. 차기테/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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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렘, 유치원 이후 처음
마지막으로 방문한 농장에는 비교적 널찍한 공터가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동네 사람들이 100명도 넘게 모여 음식 만들고 밴드가 곡을 연주하는 축제 분위기였다. 무슨 행사냐고 물었더니 나를 환영하는 동네잔치란다. 차기테 마을이 준비해서 아랫마을, 산 너머 마을 사람들까지 초대했다고 한다. 이런 성대한 마을 축제는 마을이 생긴 이래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다들 먹고살기 지쳐 여유도 없고, 다 함께 축하하거나 기뻐할 일도 없었다. 그동안 정부도, 그 누구도 가난한 이곳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작년에 이 마을 커피를 전부, 그것도 이전보다 높은 가격에 샀으니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다.
마을 대표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 함께 기도하며 행사를 시작했다. 발언하는 여러 대표와 관계자들이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해줘서 기분 좋았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그 축복과 칭찬은 멋진 커피를 생산하느라 고생한 자신들과 온두라스 커피를 아껴준 우리 고객들과 직원들이 들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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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훈 대표 일행이 온두라스 차기테 마을에 도착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100명도 넘게 모여 음식을 만들고 밴드가 곡을 연주하는 축제 분위기였다. 커피가 좋은 값에 팔리자 아랫마을, 산 너머 마을 사람들까지 초대한 잔치가 열렸다. 차기테/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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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도 한마디 해달라기에 고맙고 영광이고 오래 함께하겠다는 짧은 발언을 마쳤다. 그러자 나보고 잠깐 뒤돌아서 눈 감고 있으라고 했다. 이런 설렘은 유치원 이후로 처음이다. 잠시 후 돌아서니 멋진 그림이 앞에 있고 사람들이 손뼉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커피나무, 열매와 로스팅한 원두 사이에 내가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떠나는 길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와 고맙다고 말하는 아홉명의 생산자에게 “당신들은 더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나는 매년 더 많은 커피를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될 것 같다”고 세상 끝에서 말했다.
산을 내려오는 어둑해진 길 위에서 나는 장사꾼 기질을 발휘해, ‘이 사람들의 얼굴과 미소를 어떻게 고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연 많은 커피가 뭐 어때서.
▶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구매 일을 담당하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얼굴 있는 커피는 4주에 1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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