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03 06:48
수정 : 2019.10.08 18:36
【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 용어를 접했을 때, 상상했다. ‘갑자기 불붙듯 터지는 감정인가? 상담 중에 내담자의 무의식에 번쩍하는 성찰인가?’ 모든 상상이 빗나갔다.
가스라이팅은 심리학자 로빈 스턴이 개념화했다. <가스라이트>라는 연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연극 속 상황을 조작하고 상대방 정서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정서 학대자’가 등장하는데, 그 사람을 ‘가스라이터’라고 했다.
사전에는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가스라이터에겐 두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둘째, 상대방의 공감 정서를 이용한다. 부부, 연인 사이에 자주 등장한다. 교육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스라이팅이 일어난다.
화창한 가을 점심시간, 축구에 빠져 사는 철수가 점심도 대충 먹고 잔반을 버린다. 분명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찰 거라 생각했다. 철수에게 말했다.
“철수야, 밥은 먹고 놀아야지. 좀 더 먹고 축구해. 응?” 철수의 대답은 우울했다.
“입맛 없어요.”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었다. 맥없이 자리로 돌아가 엎드려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철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학원 레벨 테스트를 못 봤어요. 엄마가 엄청 속상해할 거예요.”
철수는 진심으로 엄마를 걱정했다. 그 말을 들은 짝꿍 영수가 끼어들며 말했다.
“저도 레벨 테스트 못 봤어요. 아빠한테 엄청 혼날 거예요.”
두 아이의 대답에서 가스라이터를 구분할 수 있다. 철수는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했다. 영수는 아빠한테 혼날까 봐 걱정했다. 건강한 아이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자기를 걱정하는 아이다. 엄마가 속상할 것을 염려하는 아이 부모는 ‘가스라이터’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엄마의 속상함까지 염려하는 아이를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감정보다 엄마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다. 정서 학대는 엄청난 곳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기감정보다 양육자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부터 시작한다. 가스라이터 부모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공략’한다.
“너 때문에 정말 속상하다.”
양육자에게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자신의 정서를 부모 감정에 공감하는 데 사용한다. 부모는 갈수록 편해진다. 아이가 엄마 마음을 알아줄 때의 환희를 놓치고 싶지 않다. 아이의 공감 능력을 지속적으로 부모를 향하게 한다. 안타깝지만 아이의 정서는 갈수록 메마른다. 메말라 붙은 정서 속, 자아 존중감이 싹틀 토양은 건조해진다.
존중감은 공감을 소진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공감받는 과정 중에 온다. 가스라이터가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엄마가 속상한 건 엄마 몫이야. 넌 네 감정에 충실해라.” 심리학자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가스라이터 양육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김선호 서울 유석초등학교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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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서울 유석초등학교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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