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최근 영국·미국 등 도자기 그릇 사용 줄어
양철 깡통·하이힐·나무토막·슬레이트 등이 접시
이상한 접시 사진 퍼지는 SNS가 원인
교양인은 음식 역사·그릇의 색과 무늬 등 즐겨
수많은 그릇 올라간 한국 식탁, 식사의 본질
이대로 가다간 사료 주머니 건 말 꼴 될까 걱정
접시가 걱정이다. 온 세상이 하나의 접시 위에 있다는 판구조론의 그 접시 말고. 아 물론 지각변동을 생각하면 판구조론의 그 접시에 대해 걱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근 몇 년간 영국과 미국에서는 도자기류 식기들의 판매량이 줄어드는 추세다.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해서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게 다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하겠다.
두 갈래의 공격이 들어왔다. 먼저 스마트폰은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그 밖의 여러 에스엔에스(SNS) 미디어를 통해 반(反)접시 프로파간다 폭탄을 떨어뜨렸다. 전 세계 레스토랑에서 접시 대신 차용한 터무니없는 대안들을 살펴보자면 프렌치프라이(감자튀김)를 양철 깡통에 담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샐러드를 삽에 담질 않나 주전부리를 생선 가시로 찍어 먹게 담질 않나 새우 칵테일을 진짜 하이힐에 담아서 내질 않나, 심지어 한국에 갔을 때 겪은 일인데 모든 음식을 미니어처 변기에 담아낸 것을 본 적도 있다. 더욱 경악할 만한 사례를 알아보고 싶다면 ‘위원트플랜트닷컴’(wewantplates.com. 번역하자면 ‘우리는 접시를 원해요 닷컴’쯤 되겠다.)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제발 누군가 부디 나에게 말해주길 바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가요? 우리로 하여금 음식의 최종 귀착점이자 운명을 일깨워주려고 하는 건가요?
그러고 나서 잼 담는 유리병의 시대가 열렸다. 식욕 뚝뚝 떨어지게 꽉 눌러 담은 샐러드부터 켜켜이 담은 디저트, 칵테일까지 모두 잼 병에 담겨 나왔고, 그 와중에 최악 중의 최악, 식탁 위의 중범죄가 발생하게 된다. 음식을 슬레이트 판에 담고, 우툴두툴한 나무껍데기 위에 올리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이 플레이팅을 도쿄에서 보았다.(도쿄 셰프님들, 접시를 활용한 아방가르드한 취향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요.) 뉴욕에서도 목격했다. 심지어는 영국의 펍에서까지 등장했다. 결국 이제 전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 되었다는 말씀.
도대체 왜 슬레이트와 나무껍질까지 붙어 있는 나무토막을 접시 대용으로 사용하는지 미스터리다. 셰프들은 슬레이트 위에 음식을 올릴 때면 소스를 커스터드만큼이나 진득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슬레이트를 싫어한다. 게다가 셰프들은 음식 대부분을 시커먼 접시에 담았을 때 얼마나 흉측해 보이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웨이터들은 지붕 슬레이트 접시를 싫어한다. 주방에서 완성되어 나온 슬레이트 접시를 손님에게 올리는 동안 음식이 주르륵 흘러 떨어지기 때문이다. 빈 그릇 치울 때는 또 어떻고. 식사가 끝난 후 접시를 가져갈 때 우아하게 슬레이트를 들어 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아, 손가락 끝을 슬레이트 밑으로 집어넣을 수가 있어야 치우죠! 게다가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도 슬레이트를 싫어한다. 왜? 도무지 기를 펴고 음식을 집을 수 없는 데다 나이프로 음식을 썰 때마다 찍 소름 끼치는 긁는 소리가 나니까. 그럼 대체 누가 지붕 뚜껑 위에 올라간 음식을 좋아하는 것인가? 아, 슬레이트 판매업자들은 좋아하겠구나.
한편 우리가 우리의 스마트폰에 완벽하게 감정이입을 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스마트폰의 그 작은 화면을 쓸어내리고 넘기면서 먹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하였고, 요식업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토르티야에 둘둘 만 랩샌드위치를 비롯해서, 옥수수, 핫도그, 바오 번(중국식 찐빵 사이에 구운 돼지고기와 절인 채소 등을 넣은 음식), 버거, 피자 조각, 반미, 부리토… 이 메뉴들은 전부 한 손엔 음식, 한 손엔 휴대전화인 채로 입에 쑤셔 넣기 딱 좋은 음식들이다. 이건 정말 반문명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다.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이 아니다. 이다음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쿠아리움의 바다사자들 먹이처럼 던져주고 받아먹는 음식을 만들게 되려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이것이다. 접시가 한 손 식사의 편리함과 스피드, 소셜 미디어라는 미학적 요구가 만나서 천천히, 천천히 사라져 냅킨 링, 생선전용 칼과 함께 이제는 사라진 식사 유물로서 박물관에 박제되는 것.
문명인의 정찬에 관한 영감을 얻기 위해 늘 그랬듯이 아시아의 방식도 살펴보았다. 한국의 전통적인 상차림은 어마어마한 수의 작은 접시들을 상다리 부러지도록 상 위에 가지런히 정렬해놓는 것이다. 그것도 대개는 아주 예쁜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바로 이 모습이 식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슬레이트, 양동이, 잼 병 따위는 감히 한국인의 밥상에 오를 생각조차 못 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가이세키 코스 요리를 보면 아름답고 때로 유서 깊은 식기, 유리로 만든 그릇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때가 있다. 이들은 음식이 담기는 접시와 그릇에 계절감을 살리기도 했는데, 따라서 가이세키 요리 해석에서는 그릇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양 있고 잘 배운 이들은 정찬을 즐기면서 계절, 레스토랑의 역사, 앞에 놓인 음식의 유래에 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한층 더 오묘한 즐거움을 얻는다. 게다가 교양 있는 이들은 식사 시간에 똑같이 접시에 대해서, 음식이 담겨 있는 그릇의 색상, 그릇의 무늬, 디자인뿐 아니라 하필 이 음식을 담을 그릇으로 이 그릇을 택했는지, 신중하게 그릇을 골랐을 그 누군가와도 교감을 나누며 즐거움을 얻는다. 예술의 역사에 대해 아주 조금의 지식만 있어도 미술관 방문 시간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릇에도 아주 조금의 노력만 기울이면 즐거움을 보상받을 수 있다. 그릇 역시 식사 시간을 빛내주는 한 단면인 것이다.
생선전용 칼은 그 옛날에도 바보 같은 물건이었다. 부르주아 흉내를 내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냅킨 링? 좋다. 이런 놈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든 말든 넘겨버리겠다. 하지만 우리가 접시 없는 세상으로의 여정을 계속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식사란 말과 말 목에 걸어두던 사료 주머니 꼴이 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뭐, 검색하고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리는 중차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적어도 두 손 모두 자유로울 수는 있게 되겠다.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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