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1.25 09:42 수정 : 2019.11.25 09:43

매해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에는 전세계 곳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지난해 베를린 집회 모습. 채혜원 제공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⑩11월, ‘페미사이드’에 맞서 싸우는 시간

매해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에는 전세계 곳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지난해 베를린 집회 모습. 채혜원 제공

독일 빌레펠트란 도시에 사는 43살의 독일 여성은 전남편에게 오랫동안 모욕을 당하고 신체적 상해를 입어왔다. 전남편의 위협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 여성은 그를 형사고발했다. 지방법원의 접근금지 조치에도 전남편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지난 9월, 출근길에 이 여성은 열차 정류장에서 그에게 부엌칼로 찔렸다. 다른 행인의 도움으로 병원에 갔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다. 가해자는 살해 의도는 없었다며 범행 동기를 부인하고 있다.

독일에 살면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면, 독일 사례인지 한국 사례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프랑스, 브라질, 러시아 등에서 들려오는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도 마찬가지다. ‘여성 살해’는 세계적으로 그 양상이 닮아 있으며, 목소리를 내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증오는 국경을 넘어 가득하다.

독일에서는 72시간마다 ‘여성 살해’가 발생하고 있다. 올해 독일에서만 119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현재 파트너이거나 전 파트너다. 살인뿐만 아니라 이들에 의해 신체 상해, 성폭력, 스토킹 등의 피해를 당한 독일인은 매해 13만명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도 올해 발생한 여성 살해만 100건이 넘었다. 프랑스와 독일 정부는 ‘여성 살해’ 대응 계획을 발표했지만 피해자 보호 시설 증가, 긴급전화 지원 확대, 사건 접수 및 처리 간소화 등 행정적 지원에 그쳤다.

지난 11월16일 열린 올해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올해 독일에서 살해된 여성 119명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채혜원 제공

여성 살해에 맞서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 그룹, ‘니 우나 메노스’. 채혜원 제공

독일 법조계 전문가들은 독일 형법 211조 개정으로 ‘여성 살해’를 형량이 가중되는 ‘증오 범죄’에 포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변호사협회 자료에 따르면 독일법은 ‘악의’ ‘잔혹함’ 등의 특징이 보이면 살인 혐의로 기소하는데, 이런 특징으로 기소되고 무기징역형을 받는 경우는 여성에게 더 자주 발생한다. 볼프강 에버 변호사는 “‘악의’는 약한 사람, 특히 여성이 저지르는 살인의 특징으로 자주 나타난다”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이 잠들었을 때 독을 이용해 살해한 여성은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지만, 다툼 중에 여성을 죽인 남자는 평균 5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고 말했다.

11월, 베를린에서는 여성 대상 범죄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여러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올해 119명의 여성이 살해당한 것을 규탄하는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가 열렸다. 독일 여성 그룹 ‘카이네 메어’(Keine mehr, 더 이상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를 포함한 집회 참가자들은 1부터 119까지 적힌 숫자를 들고, 한해 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이 살해당했는지 알렸다.

세계적으로 페미사이드에 맞서 투쟁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라틴아메리카의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단 한명도 잃을 수 없다)다. 베를린에서 ‘니 우나 메노스’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 말렌은 “페미사이드라는 단어 사용 확산과 여성 살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건 맞지만 이 이슈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려면 갈 길이 멀다”며 “독일에서 페미사이드는 여전히 다른 나라나 지역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독일 페미니스트 그룹과의 지속적인 연대로 우리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30여개 조직과 여러 개인으로 구성된 ‘베를린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은 오는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집회를 준비 중이다. 우리는 이 시위를 통해 1960년 11월25일, 군부 독재에 맞서 저항운동을 하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도미니카공화국 미라발 자매의 죽음을 추모한다. 그들의 죽음으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여성 살해’는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음을 고발할 것이다.

매서운 추위가 한창인 11월, 베를린 거리 곳곳은 더 이상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Keine mehr!),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Ni Una Menos!)는 외침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다.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다이어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