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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0 09:21 수정 : 2019.10.10 11:09

‘명성횟집’의 어묵백반. 어묵탕이 주인공이다.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어묵의 고장 부산 어묵 여행
튀긴 어묵·비계 만난 어묵 등
대구탕·스지탕에 들어간 어묵은 별미

‘명성횟집’의 어묵백반. 어묵탕이 주인공이다.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부산광역시는 입이 지루할 틈이 없는 도시다. 연탄불에 구운 양곱창과 곰장어(먹장어), 냉채족발과 동래파전을 떠올리면 소주를 따르는 환청마저 들린다. 내일 마실 술까지 깨게 하는 복국과 대구탕, 밀면 등 먹거리가 넘쳐나니 어묵은 늘 뒷전이었다. 택배 주문이 가능해서 어디서든 살 수 있는 부산 어묵을 맛보기 위해 굳이 부산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어묵 얘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부산 어묵 여행을 했다.

첫 끼니는 어묵 백반이다. 부산역에서 가까운 ‘명성횟집’(부산 동구 고관로 128)을 찾았다. 부산에는 스지(소의 힘줄과 그 주위 근육 부위)와 해산물, 두부, 어묵 등이 어우러진 어묵탕을 파는 노포(오래된 가게)가 여럿 있다. 서면 ‘마라톤집’과 광복동 ‘백광상회’, ‘수복센타’는 오후 4시에 문 연다. 명성횟집은 점심에 어묵백반을 맛볼 수 있다. 1968년에 문을 연 이 노포의 낡은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뎅 백반’(8천원)을 주문해 받고 보니 탕에 들어간 재료를 세는 것만도 한참 걸렸다. 찌고 굽고 튀긴 어묵 세 종류와 낙지, 삶은 달걀, 곤약, 다시마, 무, 새우, 유부 주머니, 두부와 스지 등이 올라가 있었다. 국물을 한술 떴다. 아! 이것은 소고기 뭇국에 다시마가 너울거리는 맛이다. 어묵을 넣는다는 부산식 탕국 맛이 궁금했던 차에 이 집에서 힌트를 얻었다.

지하철 부산진역에서 사직역으로 향했다. 2008년부터 2년간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이끈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화끈한 공격야구에 홀딱 빠져 있던 시절, 이곳을 여러 번 찾았다. 오늘 목적지는 야구장이 아닌 사직시장 근처 ‘옥당분식’(부산 동래구 사직북로28번길 101)이다. 시뻘건 소스가 발린 떡과 어묵을 먹고 있는 모녀 옆에 앉았다. 어묵 꼬치를 하나 물었다. 달콤하다. 그리 맵지도 짜지도 않았다. 이래서 어린아이도 먹는구나 싶었다. ‘어묵튀김’(5백원)을 빼놓으면 안 된다. 주문하면 어묵 꼬치를 바로 튀겨서 주름이 잡힌 면에 설탕과 케첩, 머스터드를 뿌려준다. 따끈하고 질깃한 어묵을 고기처럼 뜯어 먹다 입술에 묻은 설탕을 핥는다. 별거 아닌 맛 같은데,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옥당분식’의 어묵튀김. 바삭한 과자 같다.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다시 먹을 용기를 얻기 위해 걸었다. 걷다 보니, 경기가 없는 사직구장에 도착했다. 롯데 자이언츠는 이미 리그 최하위가 확정된 시점이었고, 구단은 차기 감독 후보 리스트에 제리 로이스터의 이름을 올린 상황이다.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나도 사직구장을 다시 찾아 어묵튀김을 뜯을 것이다.

남포동 비프거리(BIFF거리)에 ‘2019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10일부터 3일간 열리는 ‘28회 부산자갈치 축제’ 홍보도 한창이다. 축제 마지막 날엔 ‘세계 최대 회 비빔밥 만들기 도전’이 펼쳐지는데, 매년 100인분씩 추가돼 올해는 2800인분에 이른다고 한다.

국제시장을 구경하다 얼추 오후 6시가 됐다. 맞은편 부평동 골목에 ‘간판 없는 김치찌개’(부산 중구 중구로29번길 10-6)로 불리는 곳이 있다. 어둑하고 좁은 골목 끝. 시큼 짭짤한 양념이 졸아붙는 냄새가 풍긴다. 간판도 메뉴판도 없다. 외식업체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가 소개한 집이라는데, 다녀간 흔적은 없다. 자리에 앉으니 대접에 담은 보리밥과 ‘어묵김치찌개’(5천원)가 나왔다. 어묵의 단맛, 돼지비계의 진득함과 집 간장에 절인 배추김치의 신맛. 모두 강하다. 어묵이 어쩜 이렇게 쫄깃한가 하고 주인에게 물으니 답은 안 하고 어묵 봉지를 난데없이 보여준다. 40년 동안 유지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포장지 앞면엔 ‘원조 부산어묵’이라 쓰여 있고, 뒷면엔 ‘고기떡’이라고 적혀있다. 고기떡은 어묵의 북한말로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을 통해 부산에 전파된 어묵의 명칭이다. 성함을 여쭤도 그저 “보리밥이랑 김치찌개 파는 사람”이라고 손사래를 치던 주인 할머니는 맛의 비법은 자상하게 알려준다. “돼지 항정살 비계, 40년간 한 번도 바꾼 적 없는 조리법, 직접 키우는 채소가 그 비결”이라고 말한다. 10년 단골이 옆에서 거들었다. “여기 아니면 이 맛이 안 나지.”

‘간판없는 김치찌개’의 어묵 김치찌개. 매콤한 맛이 군침을 돌게 한다.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화려한 광복로를 헤매다 밤 11시 넘어 ‘수복센타’(부산 중구 남포길 25-3)에 자리를 잡았다. 50년 전통이던 간판을 60년 전통으로 바꿔 단 게 2011년이니까, 더하면 지금 이 집 나이는 68살이다. 가게 이름에 관해 물었다. “요즘은 소주를 주로 마시지만, 옛날 사람들은 술 하면 백화수복이었다. 술꾼들 기억하라고 ‘수복’ 넣어 이름 지었다고 들었다.” 대답한 이는 26년간 주방을 맡아 온 분이다. 백화수복은 75년 역사를 지닌 청주다. ‘스지 어묵탕’(2만8천원)을 주문했다. 명성횟집 탕이 바다의 향이라면 수복센타는 땅의 기운이다. 땅의 기운이 밴 무의 영혼까지 쪽 빨아낸 듯한 단맛에 감자나 토란 등의 전분이 입에 착 붙는다. 주방 앞에 앉아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어묵이 서로 붇지 않고 탱탱한 이유를 알았다. 어묵을 살짝 데쳐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스지와 부재료를 담은 그릇에 합친다. 뜨거운 육수를 여러 번 끼얹어 데우기를 반복해 따스한 온기를 유지한다.

‘수복센타’의 스지어묵탕. 푸짐한 게 특징이다.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다음 날 아침. ‘부평 깡통시장 어묵 특화 거리’(부산 중구 부평1길 48)을 거닐었다. 한국인이 운영한 부산 최초의 어묵 공장 ‘동광식품’(1945년)도 여기 부평시장에서 시작했다. 부산 어묵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니 이름난 어묵집은 다 모여 있다. 전국 어디든 부산 어묵을 손쉽게 살 수 있지만, 20여곳의 어묵 맛을 비교해 보고 주문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예전엔 시장 안에 어묵 제조공장이 있었으나 몇 번의 화재를 겪고 지금은 사하구 장림동 수산물가공특화단지로 이사했다.

부평깡통시장 어묵 특화 거리.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부산이 고향인 이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카레에 고기대신 어묵을 넣어 먹었다고 했다. 저렴한 돼지고기 뒷다릿살이나 어묵이나 가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때부터 고향이 부산인 사람을 만나면 “당신의 집은 카레에 어묵을 넣습니까?”라고 묻고 다녔다. 싫어했다는 사람도 만났고, 금시초문이라고 반응하는 이도 있었다. 내가 아는 카레는 돼지고기를 넣는 게 상식이듯, 부산의 가정집에선 카레에 어묵이 넣는 게 상식이었을 테다. 이런 상식을 깨는 또 하나의 메뉴를 만났다. 대구탕에 어묵을 넣다니!

‘맛나 기사식당’의 대구탕. 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맛나 기사식당’(부산 서구 대영로74번길 58)으로 들어서자 어묵과 여러 가지 반찬을 셀프로 담아 알아서 조리해 먹는 대구탕(7천원)을 만났다. 가장 맛있는 조합이 궁금했다. 딱 봐도 고수인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취향에 따라 먹으면 됩니다. 다대기(혼합양념)도 여코, 어묵은 푹 끓어야 하니까 냄비 바닥으로 쑥쑥 밀고, 식초 한 바퀴 두르고, 김치도 여코. 어묵 건져서 초장에 찍어 먹으이소.” 손님 김정훈씨는 역시 고수였다. 오랜 단골이 간을 맞춰 준 대구탕 맛을 봤다. 어묵의 전분이 국물에 우러나도 느끼하거나 텁텁하지 않다.

부산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부산어묵 캐릭터 사각이와 동글이.

[ESC] 어묵의 상징은 꼬치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퍼펙트맨>의 주인공 설경구와 조진웅은 부산 사직구장에서 야구단을 응원하고, 서면 젊음의 거리를 누비고, 부산항대교를 달린다. 용수 감독과 배우 조진웅은 부산 출신이다. 어묵이 빠질 리 없다. 두 주연배우가 나란히 서서 어묵을 먹는다. 부산 기장군을 배경으로 한, 2016년께 개봉한 영화 <보안관>에서 배우 이성민과 김성균도 어묵 꼬치를 들었다. 꼬치에 꿴, 주름이 잡힌 어묵은 어쩐지 더 맛있어 보인다.

부산 곳곳에 어묵 꼬치 조형물이 있다. 고래사어묵 해운대점에는 2층 건물 높이의 대형 어묵 꼬치 조형물이 볼거리다. 부산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장림포구 미도어묵 매장 앞에도 꼬치를 든 어묵 장인 조형물이 있다. 부산어묵축제를 비롯해 부평 깡통시장 어묵 거리를 홍보하는 부산어묵 캐릭터 사각이와 동글이는 사단법인 부산어묵전략식품사업단이 제작했다. 사업단 심볼 마크도 일품이다. 부산의 영문 ‘B’와 어묵의 ‘E’를 이용해 따뜻한 국물에 담긴 어묵 꼬치를 형상화했다. 누가 봐도 어묵이다. 한편 올해로 5회째를 맞는 부산어묵축제는 11월29일부터 3일간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 해변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유선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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