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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7 15:14 수정 : 2019.07.18 14:00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목차

① 도로 신입: 불황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② 개꿈: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③ 동구 아줌마의 구직: 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④ 공장만 남은 도시: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2018년 1월 울산 동구의 일산새마을금고 방어지점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1억1천만원어치의 현금 5만원권 1200장과 1만원권 5천 장을 챙겨 경남 거제로 달아났다. 범인은 범행 6시간30분 만에 거제 옥포동의 한 모텔에서 붙잡혔다. 울산 동부경찰서로 압송되던 그에게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졌다. 포승에 두 손이 단단히 묶인 채 고개를 숙인 그는 경찰관 두 명에게 붙들려 가며 답했다. “힘들어서 그랬지요, 사는 게….” 강도 사건의 범인은 49살의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였다. 그가 달아난 거제는 이전에 하청 노동자로 일했던 곳이었다.

위기 안에서도 등급은 나뉘었다. 박보성과 김형식 같은 과장급 이상 사무직 희망퇴직 대상자 외에도 여성 사무직에게 희망퇴직을 권유하는 면담을 하면서 구조조정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2015년 6월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인위적인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하청 노동자들은 권오갑의 말에도, 회사 대책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청 노동자의 강도 행각은 하루 만에 일단락됐지만 하청 노동자와 가족들 삶에는 일단락이 없었다.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에 자리잡은 ‘현대중공업 갑질 철폐 대책위원회’ 농성장에 하청업체 대표 두 명이 앉아 있다.

“필리핀이나 갈래요?”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수는 고무줄이었다. 수주량이 많으면 늘어났다가, 물량이 없으면 한꺼번에 잘려나갔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석유업체들의 해양플랜트(해저에 매장된 석유 등을 탐사·시추·생산하는 장비) 발주량이 늘자 2010년대 중반 해양(플랜트)사업부에서 일하던 정규직 대 하청 노동자 비율은 3 대 7을 넘나들었다. 한때 1 대 9까지 치솟았다. 하청 노동자 사이에도 하청 상용직 노동자와 재하청 일용직 노동자(물량팀) 비율이 3 대 7에 이르렀다. “하청 노동자 없으면 배를 못 만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2014년 11월부터 해양플랜트 신규 주문이 끊겼다. 국내 조선사들의 공격적인 과다 수주, 원가 이하의 해양플랜트 수주에다 국제 유가 급락이 겹쳤다. 경영진이 저가 수주를 했고 국제 유가는 다른 나라 유전의 이야기였지만 급락의 쓰나미는 해양사업부의 가장 밑바닥이 받아냈다. 하청 노동자들은 간단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2015년 3만2704명이었던 하청 노동자는 2년 새 1만4163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정규직 노동자는 1만4633명에서 1만1493명으로 줄었다. 2017년 9월 닥칠 해양사업부의 대규모 유급 휴업, 휴직의 전초전이었다.

싼 인건비로 마음껏 쓰이다가 내버려진 하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울산 동구를 떠났다. 하청 노동자 최남형(44)도 2017년 필리핀 수비크까지 날아갔다. 한진중공업 자회사인 수비크 조선소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싼 임금을 찾아 자본은 전세계를 누볐다. 한진중공업도 수비크에 공장을 만들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수비크 공장은 ‘노동자의 무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필리핀이나 갈래요?” 최남형은 동료 하청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10여 명이 함께 수비크로 갔다. 3개월짜리 일이었다. 그곳에서 최남형은 숙련 노동자로 대우받았다. 한 달에 20일을 일하면 650만∼680만원을 손에 쥐었다. 한국 조선소보다 300여만원 더 쳐준 액수에 타향살이도, 끈끈한 더위도 버텨냈다. 수비크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오면 타오르던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공장은 다른 세상이었다. 혹시 철판 온도가 떨어질까 예열 패드를 붙였다. 150도를 웃도는 철판들 사이에서 최남형은 용접을 했다. 필리핀 특유의 끈끈하고 뜨거운 습도가 진드기처럼 온몸에 달라붙었다. 3∼4ℓ 물을 챙겨 가도 오전이면 다 마셨다. 땀을 너무 흘려 소변도 누지 않았다. 같이 왔던 다른 노동자들은 진이 다 빠져 계약 기간 3개월을 못 채우고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한진중공업은 임금이 싼 중국인들을 쓰기 전까지 한국인들을 수비크로 불러 배를 만들었다.

정규직 아버지, 하청 노동자 아들

숙소는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들었다. 몸만 눕히는 옹색한 방에서 잠을 잤다. 주말이면 최남형은 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평일에는 맞벌이하는 아내가 피곤할까봐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참았다. 잠이 들지 않는 날에는 아들이 생각났다. 중학생이 된 아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아들은 1년 전 최남형에게 물었다. “아빠, 월급 안 들어온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으로 찾아봤지.”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구조조정’ ‘임금 체불’ 같은 열쇳말을 검색했을 아들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울산 동구에는 ‘조선소 드리머’가 부산, 경남, 경북 등 외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제조업 중산층’을 꿈꿨다. 서울에서 웹마스터로 일했던 최남형도 2006년 박봉에 긴 시간 일해야 하는 정보기술(IT) 업계를 떠나 울산 동구행을 택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으로 정년퇴직한 장인어른의 말이 그를 꿈꾸게 했다. “1년 정도 일하면 정규직을 뽑을 거야. 일단 울산 동구로 내려와라.” 최남형은 아내와 아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내려와 하청 노동자가 됐다. 1년 뒤 정규직이 되면 가족도 내려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남형의 시절은 장인어른의 시절과 달랐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현대중공업은 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조선소 드림’은 개꿈이었다.

최남형처럼 울산 동구에선 직장 동료가 친척이고, 가족이었다. 울산 전체 조선업 종사자의 89.6%가 동구에 살았다.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던 이들은 세대에 따라 ‘일자리의 질’이 단절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을 만들었다. ㅎ하청업체 대표 변성운(43)의 아버지는 이때 정규직 노동자가 됐다. 아버지가 정규직으로 정년퇴직했을 때 변성운은 하청 노동자였다. 조선소 드리머인 최남형이나 변성운은 장인어른이나 아버지처럼 정규직이 될 수 없었다. 제조업 중산층이 되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부러진 지 오래였다.

변성운은 매일 조선소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아버지는 그에게 “현대중공업이야말로 안정적이고 보수 좋은 최고의 직장”이라고 가르쳤다. “훈련원에 들어가 정규직 노동자(직영)가 돼라”고 했다. 하청업체에 다니던 변성운은 아버지의 권유로 훈련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40명이 들어가면 2∼3명꼴이라도 정규직이 되던 바늘구멍은 이후 더 작아졌다. 변성운은 하청업체에서 연륜을 쌓다가 반장이 됐다. 그러고는 아예 하청업체를 차렸다.

2015년 7월 변성운은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중공업의 수주량이 점점 줄더니 구조조정설이 돌았다. 업체를 차린 지 1년도 안 돼 4대 보험료 7천여만원, 임금 1억7천여만원이 밀렸다. 폐업이었다. 울산 동구에서 조선소 하청업체 수는 2016년 6월 648개에서 2018년 10월 486개로 줄었다. 2년 새 하청업체 162개(전체의 25%)가 문을 닫았다.

변성운은 집에 가도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개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갔다. 가족과 직원들에 대한 죄책감은 술로도 견딜 수 없었다. “무섭다. 집에 들어오지 마라!” 가정도 그의 회사처럼 깨졌다.

번번이 배신하는 하도급 공사비

변성운은 2018년 4월 ㅎ하청업체를 다시 세웠다. 직원이 167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임금이 밀렸다. 2019년 1월 적자는 1억4천만원으로 불었다. 변성운은 사채를 꿔다가 직원들에게 월급을 줬다. 현대중공업이 다달이 주는 하도급 공사비(기성금)만 믿고 급한 마음에 꾼 돈이었다.

하지만 선 시공 후 계약 방식의 하도급 공사비는 번번이 그를 배신했다. 현대중공업은 일단 하청업체에 공사부터 시켰다. 계약은 정작 공사가 끝나고 한 달 뒤에나 했다. 제때 하도급 공사비를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지만 얼마를 받을지 모르는 게 더 답답했다. 공사에 투입한 인원과 작업 시간을 산정하는 방식이 비공개여서 기성금 내역을 알 수 없었다. “이번 달은 (하도급 공사비) 맞춰줄게요. (늘어난 인원과 작업 시간만큼) 추가로 줄게요”라던 현대중공업 쪽의 구두 약속은, 막상 공사가 끝나면 “회사에 돈이 없어요. 계약금이 전부예요”라는 말로 뒤집혔다. 직원 수를 100여 명으로 줄여도 다달이 적자가 1억여원씩 났다. 개인 돈으로 부족한 세금을 메웠다. 임시로 현대중공업이 조성한 ‘상생발전기금’ 1억원을 대출받았다. 하지만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났을 뿐이다.

월급만큼은 주고 싶었다. 4대 보험료까지 체납하면서 지키고 싶은 최후의 보루였다. 최선은 가끔 뒤통수를 쳤다. 2016년 고용노동부가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하면서 국민연금 등 4대 보험료 납부를 유예하고 강제 징수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4대 보험료 체납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면 노동자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월급을 주느라 직원들 돈줄을 막아버린 셈이었다.

2019년 4월 어느 날, 낮 12시30분께 현대중공업 정문 앞. 두 번째 폐업을 앞둔 변성운은 마이크를 잡았다. “하도급 공사비 삭감으로 인한 피해 전액 보상을 촉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터전에서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직원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변성운이 내건 펼침막에는 “협력업체 다 죽이는 현대중공업은 책임져라!”라고 적혀 있었다.

약 1시간 뒤 변성운이 서 있던 현대중공업 정문을 하청 노동자 최남형과 조윤호(52)는 오토바이로 빠져나와 동구청으로 갔다. 그들과 함께 오토바이 30여 대가 대열을 이뤘다.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 중이었다. 하청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벌인 것은 처음이었다.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 ‘현대중공업 갑질 철폐 대책위원회’ 농성장에 서 있던 이원태 동영코엘스 사외 하청업체 대표이사는 오토바이 대열을 지켜봤다. 요란한 소리가 제법 그럴듯했다. 이 감동을 담아두려 이원태는 연달아 동영상을 찍었다.

오토바이 대열이 향한 동구청에서는 오후 2시부터 하청 노동자를 채용하는 ‘조선산업 사내협력사 채용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최남형과 조윤호는 채용박람회가 열리는 행사장 앞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서러웠다. 하청업체 사장들도 미웠다. 하지만 원청과 하청의 이중적인 고용 관계에서 하청업체 사장들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둘도 알았다.

채용박람회에 올라온 공고문에는 시급 8350원∼1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조윤호가 받은 시급도 1만원이었다. 경력 햇수는 쌓여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한 달에 300시간 넘게 일하면서 평일 잔업과 휴일 특근수당으로 적은 기본급을 보전했다. 이마저도 현대중공업의 수주량 감소로 조업이 단축돼 소득이 급감했다. 소득 절벽이었다.

숙소인 원룸으로 돌아간 최남형은 포털 검색창에 ‘동구청’ ‘채용박람회’를 써넣었다. ‘채용박람회장까지 점거한 민노총’ ‘또 난동… 채용박람회 드러누운 민주노총’ ‘엉망된 울산 조선업종 채용박람회’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떴다. ‘개념 없는 민폐 노조들’ ‘자기들 회사 가서 할 것이지 이래도 되는 건가요?’ 기사에는 자신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무더기로 달렸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울산 동구는 다시 섬이 된 것 같았다.

열사라도 되어야 하나

조윤호의 답답함도 비슷했다. 순간적인 충동과 감정이 시청 바닥에 누워 있던 조윤호를 오후 내내 괴롭혔다. ‘내가 지금 파업할 때인가….’

“사는 게 힘들다….” 2019년 4월 초 조윤호는 부산에 사는 가족에게 전화를 돌렸다. 조윤호의 전화에 부산 집이 뒤집혔다. 생전 연락도 안 했던 여동생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은 조윤호의 큰딸에게 신신당부했다. “너희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한다! 아버지 얼른 데리고 내려와라!” 딸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화로 안부를 확인한 뒤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관으로 파업 현장을 자주 다니던 조윤호의 형도 그에게 거듭 당부했다. “열사는 되지 마라.”

평탄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평범한 하청 노동자들은 어느 순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윤호는 신용불량자였다. 카드값과 통신비가 밀렸지만 은행 대출도 막혔다. 대출 상담원은 “직장 건강보험 가입자인데 4대 보험료를 체납해 안 됩니다”라고 했다. 4대 보험료 체납 유예 조처가 부른 부작용이었다. 아내는 갑상샘암에 이어 자궁암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아들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돈이 급했다. 조윤호가 할 수 있는 일은 밀린 임금이라도 온전히 받는 것이었다.

조윤호는 일자리를 찾아 부산과 울산 동구를 오갔다. 2017년에는 부산 한진중공업과 영세 조선사에서 일했다. 한진중공업에서 ‘마라도함’을 만들기도 했다. 대형 수송함인 ‘독도함’만큼 큰 배였다. 현대중공업 자회사인 미포조선의 부산 사외 하청업체에서도 일했다. 그는 좁은 작업 공간에 몸을 구겨넣고 일했다. 몸으로 벌어먹을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조선소에서 일하다 일감이 없으면 새벽같이 건설 현장에 용역을 다녔다.

조윤호는 2018년 8월 다시 울산 동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소에서 다시 일한 지 반년도 안 돼 2019년 2월 50%, 3월 100%의 월급이 밀렸다. 4월 중순에야 3월치 월급의 4분의 1이 나왔다. 어김없이 아침이 오면 여관 달방(한 달 단위로 방을 계약해 거주하는 것)에서 눈을 뜬 조윤호는 구부러진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1분에 7500차례나 떨리는 연마 기계(그라인더)에 맞댄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두껍고 평평하게 박인 굳은살은 손가락 마디 주름까지 지워버렸다. 이 손가락을 혹사해서라도 일하고 싶었다.

식사는 라면으로 때웠다. 일회용 카레, 일회용 짜장에 밥을 말아 먹었다. 밑반찬은커녕 김치도 없었다. 월세 23만원에 전기요금과 가스비만으로도 빠듯했다. 조윤호는 방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며 넋 놓고 앉아 있었다. 윗집에 사는 집주인이 물었다. “일 안 해요?” 조윤호는 둘러댔다. “오늘 쉬어요.” 비참한 생활이 한심스러워지면 돈을 받기 위해 열사라도 되어야 하나 싶었다.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고공농성이라도 할까.’

현대중공업 노동자 대부분은 오토바이를 장만하는 것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소 노동자로서 삶이 끝나고 그곳을 나서면 오토바이도 쓰임이 끝났다.

2년 만에 꺼낸 오토바이

아침이면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였다. 아침 8시 전, 저녁 6시 이후 조선소 출퇴근 시간에는 울산 동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방어진순환도로가 오토바이들로 뒤덮였다. 교통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면 도로에는 오토바이 수십 대가 한자리에서 공회전했다. 오토바이에 탄 사람은 하나같이 푸른 작업복에 검은 작업화 차림이었다. 울산 동구의 상징과도 비슷한 오토바이 물결은 외지 사람들에게 흡사 동남아 도시의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울산 동구에 돌아다니는 자가용 오토바이(2만5724대)는 자가용 승용차(5만5740대) 절반에 가까운 수였다. 한밤에 현대패밀리동부아파트 단지 한쪽에는 오토바이 수십 대가 주차장 한 줄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건강이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를 택하는 노동자도 더러 있었다. 방어진순환도로 길가에는 오토바이를 팔거나 고치는 가게만 15곳 넘게 있었다. 현대중공업 작업장에도 오토바이 수리점이 2곳 있었다.

오토바이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다. 조선소 작업장 면적은 632만㎡에 이르렀다. 작업장에서 구내식당까지만 걸어도 20여 분이 걸렸다. 식당에 갈 때도 노동자들은 오토바이를 탔다. 조선소 노동자는 오토바이를 장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소 노동자로서 삶이 끝나고 그곳을 나서면 오토바이도 쓰임이 끝났다. 2016년 초 조선소를 나온 하청 노동자 박세호(38)의 오토바이처럼.

박세호는 덮어놓았던 오토바이를 2년 만에 꺼냈다. 그는 휴대전화 거치대를 오토바이 머리에 달았다. 오토바이 뒤편에는 커다란 배달통을 걸었다. 피자나 치킨을 거뜬하게 넣을 정도로 큰 배달통이었다. 박세호의 출퇴근 오토바이는 이제 배달 오토바이로 바뀌었다. 2018년 12월 그는 배달 오토바이를 시작했다.

박세호는 가족과 항상 저녁밥을 먹었다. 맞벌이를 하는 네 식구가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저녁밥을 먹는 틈틈이 휴대전화를 열어 배달 주문 실시간 상황을 살폈다. 저녁 8시30분, 배달 주문이 몰려들 시간이었다. 집에 온 지 2시간도 안 돼 그는 오토바이 열쇠와 배달업체 유니폼 조끼를 챙겨 집을 나섰다. “아빠, 또 나가?” 둘째 아들이 물었다. 7살, 5살 어린 두 아들은 아빠와 더 놀고 싶었다. “이거 해야 너희 맛있는 거 사주지.”

박세호는 2016년 하청업체가 문 닫기 직전 스스로 걸어 나왔다. 2014년 들어간 하청업체였다. 사무실에는 “물량이 줄어든다”는 얘기가 돌았다. 박세호의 임금도 줄기 시작했다. 관리자인 박세호의 월급은 300여만원이었다. 하도급 공사비가 적게 나오자 사장은 먼저 관리자들의 임금을 10% 줄였다. 그 10%는 두 번 더 이어졌다. “10% 더 깎자.” “10%만 더 깎자.” 반년 새 박세호의 월급은 200만원대로 줄었다. 어느 날 사장이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회사 상황이 안 좋다. 관리자들은 벌써 30% 삭감했다. 같이 살려보자.” 사장은 돈을 빌리러 다녔다. 담보도 잡혔단다. 그래도 월급을 메우기 부족했다.

“우짜겠노, 회사가 힘들다는데….” 박세호는 아내에게 임금 삭감 소식을 한참 뒤에 말했다. 그제야 텔레비전에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의 구조조정을 호들갑스럽게 전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부부는 급한 대로 대출을 받았다. 부족한 생활비를 대출금으로 메우고 돌려막았다. 이자는 계속 쌓였다. 알면서도 빚을 메워야 하니까 대출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부터 쌓인 빚은 아내와 박세호 각각 4천만원, 5천만원씩 1억원 가까이 됐다. 수입이 없자 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었다. 부부는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현대중공업’ 가득한 비 오는 거리

하청업체를 그만둔 박세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일자리를 구했다. 2016년 말 울산 중구의 욕실 자재를 파는 업체에 들어갔다. 자재점의 1t 트럭을 몰고 인테리어 업체에 자재를 배달하러 경주, 부산까지 장거리 운전했다. 이따금 적재함에 쌓인 주방·욕실 타일과 변기 도기들의 ‘덜그럭 덜그럭’ 소리만이 운전의 적막을 깼다. 하지만 그에게 장거리 운전보다 더 힘든 일은 평일에도, 주말에도 두 아들과 놀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컨베이어 설치 업체에 이어 지금 다니는 공구점까지 박세호는 쉬지 않고 일했다. 직장과 직장을 옮길 때도 그는 쉬지 않았다.

박세호는 공구점에서 퇴근한 뒤, 하루 평균 두세 시간 배달 주문을 받았다. 하루 평균 10건도 안 됐다. 어릴 때부터 전업이던 젊은 배달 노동자들은 하루에 70∼80개씩 배달 주문을 받았다. 조선소의 최말단에서 밀려난 하청 노동자들은 더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배달 노동자들과도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울산 동구 토박이인 박세호도 오토바이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38년 살았지만 어느 골목에 어느 통닭집이 있는지 몰랐다. 2019년 4월 장대비가 쏟아지던 늦봄의 밤거리는 다시 현대중공업 로고로 가득했다. 한때 조선소 노동자 또는 현직 노동자들은 비가 오자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전성기를 상징하듯 작업복은 튼튼했다. 방수 처리가 돼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빗방울이 맺힌 현대중공업 로고들이 번쩍거렸다.

그들의 오토바이 뒤편에는 박세호 오토바이처럼 배달통이 달려 있었다. 그 오토바이들은 치킨집 앞에 멈췄다. 이내 배달통에 치킨을 담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건물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운 배달 노동자는 곧장 초인종을 눌렀다.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배달 노동자를 봐도 울산 동구 사람들은 덤덤했다. 박세호는 옛 동료들을 그저 스쳐 지나갔다. 그 역시 배달 주문이 밀려 갈 길이 바빴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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