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4 05:59
수정 : 2019.10.04 20:48
[책&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아카넷(2011)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새벽 내내 뒤척이다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남역 사거리. 출근하는 행인들은 앞만 보고 걷고, 식당과 카페는 날 밝기를 재촉하며 아침을 켜고 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 벽돌 같은 빌딩 앞에 해고노동자 김용희씨의 철탑이 솟대처럼 서 있다.
철탑 꼭대기에 나부끼는 깃발은 외롭다. 피켓에 부적처럼 적혀 있는 빨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에 노조 만들다 인생 망쳤습니다.” 유령 같은 문장이 통곡이 되어 내 마음을 찢어놨다. 그 밑에 열거된 이력들은 그 자체로 슬픔의 잔혹사다.
그와 나는 분명 같은 세계이지만 다르게 속해 있었다. 그가 있는 하늘의 공간과 내가 있는 지상의 공간 사이에 거리로 잴 수 없는 큰 허공이 존재했다. 철탑에 다가갈수록 나는 두려워졌다. 가늠할 수 없는 철탑의 마음이 내 허위를 너무 훤히 비치고 있었다.
로마의 유물론자 루크레티우스는 세계가 무(無)에서 생겨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마 무에서 생겨났다면 사과 씨앗이 아닌 것에서 사과나무가 나고, 거대한 나무숲이 하루아침에 솟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으로 일단 생겨난 것은 무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물체들은 원자 수준으로 해체되어도, 결코 무가 되도록 파괴되지는 않는다. 나무에 열린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지만, 야생동물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은 살아내고, 다시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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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삼성 노조설립위원장 활동으로 1995년 부당해고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희씨가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 철탑.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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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우스의 세계에서 물체들은 허공에서 쉼 없이 운동한다. 정해진 대로 계속 생겨나고, 죽어도 다른 삶과 결합하여 거듭 살아낸다. 루크레티우스 원자론을 인간사에 한정시킬 위험이 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저 삶이 곧 그가 말한 원자의 수직 낙하이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무로 돌아갈 수 없는 이 행로는 끝없이 길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것 같은데,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계속 떨어진다. 우리의 삶은 충돌도 없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는다. 평행의 삶에는 새로워질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라야 지그재그 박음질하듯 담벼락 넘을 생각을 한다. 루크레티우스가 묻는다. 평행 궤도에서 비켜나서 운명의 법을 깨뜨릴 운동이 시작되지 않으면 대체 어디에서 자유의지란 게 가능하겠는가?
지금과 다른 운동이 시작되는 핵심은 자유의지다. 루크레티우스는 이 자유의지를 운명으로부터 빼앗아낸 의지(fatis avolsa voluntas)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해진 대로 살던 사람 누구나 자유의지를 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자유의지의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서 생성된다. 루크레티우스에겐 정신과 영혼도 물질이다. 정신은 마치 패배한 존재인 듯 참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아마 자유의지는 정신의 공동체 안에서 지저귀는 저항의 원자들일 것이다. 힘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면 분주해지는 저항의 원자들.
정해지지 않은 곳, 정해지지 않은 순간, 이 자유의지가 사지로 퍼지면서 순식간에 운명의 궤도를 아주 약간 이탈한다. 이 ‘이탈’이 바로 ‘클리나멘’(clinamen)이다. 아주 약간 움직였을 뿐이지만 이제 지그재그 담을 넘어 평행으로 가던 저편 타자와 마주치게 된다.
김용희씨의 외로운 깃발과 피켓이 벼락처럼 담을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 가족, 내 직장, 내 정념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 있구나. 우리가 개혁 같은 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존재를 걸고 이곳으로 넘어왔다. 인생을 망치고서, 가늠할 수 없는 저곳에 올라갔다. 내가 비록 허위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지만, 그 허위의 힘이라도 그의 싸움에 보탬이 되기를, 그리고 그가 나에겐 큰 배움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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