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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03 16:37 수정 : 2019.07.03 19:15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나는 한 대학병원의 소아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소아정신과라고 아이들만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이들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나아가 그 문제를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선 부모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

병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모님들의 태도는 위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이곳’까지 와야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는 동안 알아차리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책감이 때로는 의사가 던지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날 선 반응을 보이도록 만든다. 예전에는 같이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힘드셨냐는 이야기를 건네면 열에 대여섯분은 눈물을 보인다. 눈물과 함께 그들을 감싸고 있던 막 하나가 벗겨져 내리면서 부모는 비로소 아이의 치료 과정 속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런데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이 이상으로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 만난 고등학생 ㄱ의 어머니가 그랬다. 우울감과 반복적인 자살시도로 병원을 찾은 ㄱ은 부모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며 반감을 표현했다. 아이의 문제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묻자 ㄱ의 어머니는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며 울먹였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생활 능력이 없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시어머니까지 모셔야 했던 그는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욕을 하거나 밥상을 엎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폭력적인 태도를 견디다 못해 집에서 도망치는 일이 일상이었다고 했다.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했을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며 한참을 오열하는 ㄱ의 어머니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라는 존재와 제대로 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ㄱ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처해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 과연 ㄱ의 어머니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지금도 치매로 요양원에 가 있는 시어머니가 밤마다 현관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꿈을 꾼다고 했다.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걸어온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아이를 위해 변해야 한다는 다그침이 아니라 진심 어린 위로와 적절한 치료였다. 하지만 치료를 권유하자 ㄱ의 어머니는 “아이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나까지 어떻게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며 망설였다.

치료를 제안받은 부모님들의 대다수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아이보다 자신의 어려움을 앞세우는 것처럼 느끼거나,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인정해버리면 ‘부모로서 자격미달’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돌보는 것이 곧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이와 애착 관계를 다시 형성하려면 아이가 표현하는 바를 충분히 수용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부모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아이에게 만들어주기 어렵다. 아이를 위한 받침대가 되기 위해서는 튼튼하게 기반을 다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받는 경험은 아이의 문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ㄱ의 어머니는 설득 끝에 결국 치료를 시작했다. 그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내면의 불안감과 우울감이 줄어들며 아이의 이야기에 좀 더 담담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어주려고 해도 줄 수 없었던 마음의 여유 공간이 생긴 것이다. ㄱ 역시 엄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면서 모녀 사이는 더디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많은 부모가 아이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행동 문제만을 본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아이는 곪아버린 가족 관계의 상처를 ‘증상’이라고 부르는 수단을 이용해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부모 역시 아이 못지않은 변화를 거쳐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ㄱ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마음속 문제를 돌아보고 돌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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