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수근의 기억실험실
⑨ 공부 잘하는 법
반복학습은 암기에 도움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하면 효과는 적어
한번 공부한 뒤 연습시험 통해
끄집어내 떠올리면 더 오래가
좌뇌형-우뇌형, 시각형-청각형…
말 많지만 검증된 학습법 아직 없어
‘깊게 이해, 문제 풀고, 적절한 수면’
평범하지만 최선인 공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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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도 이해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반복해서 읽고 쓰는 암기법만으로는 공부한 내용을 오래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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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에 영어 단어를 외우기 위해 종이에 단어를 한가득 채워 쓰곤 했다. ‘깜지’ 또는 ‘빽빽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부법은 이른바 ‘암기과목’을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깜지’를 하느라 다 쓴 볼펜을 자랑스럽게 모아놓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쌓여가는 볼펜의 개수가 꼭 높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하려면 암기도 잘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배운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여러번 반복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면 과학적으로 검증된 ‘공부 잘하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반복학습보다 인출연습
가장 보편적인 공부법은 아마도 ‘반복해서 읽기’일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단지 교과서를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거나 ‘깜지’를 쓰는 방법은 들인 노력에 비해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다. 사실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가보다는 한번을 하더라도 얼마나 제대로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
1975년에 이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여러 단어를 제시하면서 단어에 관한 몇가지 과제를 주었다. 단어의 글자가 대문자인지 소문자인지(시각적 처리 과제), 단어가 다른 단어랑 운율이 맞는지(청각적 처리 과제), 단어가 문장의 빈칸에 들어가도 되는지(의미적 처리 과제)를 판단하게 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단어를 외우라는 지시를 하지는 않았다. 연구진은 단어 처리 과제를 마친 실험 참가자들에게 예고하지 않은 깜짝 테스트를 시행해서 얼마나 많은 단어를 기억하는지 조사했다. 결과는 아마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각 또는 청각으로 정보를 처리했던 단어보다 의미를 따져 처리한 단어를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즉, 더 복잡하고 의미 있는 정보 처리를 할수록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되새기며 교과서를 여러번 되풀이해 읽으면 기억에 도움이 될까? 연구에 따르면, 그저 반복해 공부하는 것보다는 중간에 시험을 치르는 게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의 헨리 로디거 교수가 2006년 이와 관련한 실험을 했다. 그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과학 내용이 담긴 교재 자료를 제시하고서 공부하게 했다. 일부 학생들은 자료를 두번 반복해서 공부했고, 다른 학생들은 한번 공부하고 연습시험을 한번 치렀다.
5분 뒤 자료 내용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 검사한 결과에서는, 반복 학습한 학생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주일 뒤 다시 시행한 검사에서는 결과가 뒤집혔다. 한번 공부하고 연습시험을 봤던 학생들이 시험 없이 반복 학습만 했던 학생들보다 실제 시험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즉, 반복 학습을 통해 정보를 여러번 저장하는 것과 비교해, 저장된 정보를 시험문제 풀이를 통해 인출하는(끄집어내어 떠올리는) 연습을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연습시험이 그저 시험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은 아닐까? 다른 연구에서는 실제 시험과 연습시험의 형식이 다르더라도 연습시험이 반복 학습보다 더 나은 공부법이라는 결과가 제시됐다. 공부한 내용을 다시 읽으면 뇌에서는 이전에 저장된 정보만이 다시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시험문제를 풀면서 답을 떠올릴 때는 저장했던 정보와 함께 관련된 다른 정보도 함께 활성화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지식과 새로 배운 정보가 통합되기도 하고, 관련이 없어 방해되는 정보는 억제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출 연습을 한 정보는 좀 더 정교화되고 잘 기억될 수 있다.
반복해 읽는 학습법은 ‘많이 공부했다’는 만족감을 준다. 반면에 연습시험 문제를 풀다 보면 모르는 게 많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일단 학습을 한 다음에는 반복 학습보다 반복 인출 연습이 기억을 더 오래가게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공부할 때 다음 몇 가지를 시도해볼 만하다.
교재에서 한 챕터가 끝나는 곳에 연습문제가 실려 있다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풀어보기 바란다. 챕터를 반복해 공부하는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연습문제가 없다면 직접 질문을 만들고 답해보거나, 배운 내용을 차례로 다시 떠올려보는 인출 연습을 해봐도 좋다. 배웠던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해내지 않아도 괜찮다. 로디거 교수의 다른 연구에서는 인출 연습을 한 정보뿐만 아니라 시험에서 다뤄지지 않은 다른 관련 정보의 기억도 덩달아 향상되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치르기보다는 학기 중에 쪽지시험을 여러번 보는 것도 배운 내용을 잊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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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선 여러 연구에서 검증된 효과적 학습법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주의 깊게 공부하고, 배운 내용을 시험해 보고,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게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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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형은 분석적, 우뇌형은 창의적
반복 학습이건 인출 연습이건 간에 공부에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이라면 밤을 새워 한 글자라도 더 머릿속에 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전 연재 글에서 다뤘듯이 뇌는 잠자는 동안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한다
.(5월16일치, ‘4당5락? 잠자는 동안 뇌는 낮에 공부한 내용 복습한다’) 잠을 자지 않으면 학습한 내용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기 어렵다.
적절한 수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혹시 ‘서머타임’(일광시간 절약제)을 기억하는가? 낮이 긴 여름에는 표준시를 1시간 당기고 낮이 짧은 겨울엔 시간을 되돌리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번 시행되다가 1988년 이후에 사라진 제도이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여름마다 시간을 1시간 당기고 있다.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서머타임을 시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같은 주 안에서도 서머타임을 시행하는 곳과 시행하지 않는 곳이 나뉘기도 한다.
이를 이용해 연구자들이 재밌는 비교를 해봤다.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서머타임을 시행한 카운티의 학생들은 1시간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일주기 리듬(생체시계)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 학생들은 미국의 대입 수능시험 격인 에스에이티(SAT) 시험에서 서머타임 제도를 시행하지 않은 카운티의 학생들보다 약 16점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서머타임으로 단순히 일어나는 시간만 빨라지는 게 아니다. 서머타임 시행 직후에는 일주기 리듬이 바뀌고 잠 시간이 줄어 주의 집중의 기능도 떨어질 수 있다.
학습 효율을 높인다고 알려진 여러 방법이 있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학습법 중에도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좌뇌형-우뇌형’ 학습 유형일 것이다. 뇌에는 좌반구와 우반구가 있고, 일부 기능은 좌뇌 또는 우뇌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창의적인 사람은 어느 쪽 뇌가 우세하다’거나 ‘어느 한쪽 뇌 위주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 더 직관적’이라는 등의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실제로 미국 유타대학 연구진이 2013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으로 1000여명의 뇌를 조사한 결과에서는 이른바 ‘좌뇌형’과 ‘우뇌형’ 활성화 패턴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뇌를 존재하지 않는 좌뇌형-우뇌형으로 나눈다면, ‘나는 한쪽 뇌가 더 우세하니 덜 창의적이야’라거나 ‘나는 이쪽 뇌가 우세하니 감성적인 면이 강하고 분석적인 면은 약해’라며 지레짐작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해버릴 위험이 있다.
또 다른 널리 알려진 학습법으로 ‘시각형-청각형-신체감각형’ 학습 유형이 있다. 이름 그대로 시각형 학습자는 시각자료로 공부했을 때, 청각형 학습자는 정보를 소리로 들었을 때, 신체감각형은 몸을 움직여 경험했을 때 더 잘 배울 수 있고, 그래서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유형으로 공부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의 해럴드 패슐러 교수가 2008년에 이런 학습 유형에 대한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검토했더니, 선호하는 유형에 맞춰 공부하더라도 학습효과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결과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람마다 시각이나 청각, 신체감각 정보 중 특정 유형을 다른 유형보다 선호할 수는 있다. 또한 어떤 정보는 특정 유형으로 제시될 때 이해하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쉽다. 그러나 둘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는 없었다. 시각형 정보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늘 시각적으로 공부했을 때 학습 효율이 특별히 더 높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내가 어떤 유형의 정보를 선호하는가보다는 배워야 할 내용이 어떤 유형에 적합한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내가 시각보다 청각을 선호한다고 하더라도 ‘뇌의 구조’를 배운다면 ‘청각적’으로 설명을 듣는 것보다 ‘시각적’으로 직접 각 뇌 영역의 위치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영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배우기 위해서 발음기호를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청각’으로 듣고, ‘신체감각’으로 직접 발음해 보는 게 훨씬 낫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완벽한 공부법을 연구자들이 언젠가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로선 여러 연구에서 검증된 효과적 학습법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주의 깊게 공부하고, 배운 내용을 시험해 보고,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게 좋다. 유산소 운동도 기억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
(6월15일치 ‘운동하면 기억력이 좋아진다’) 마치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건강에 좋다는 말처럼 뻔한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건강해지고, 모두가 효과적으로 공부하게 되진 않는다.
나 역시 ‘기억 인출 연습’을 하면 기억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다시 찾아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그 연습을 소홀히 해, 애써 공부한 자료를 다반사로 잊어버린다. 운동과 잠이 중요하다는 글을 쓰는 지금도 졸린 눈을 비비며 거북목을 한 채 몇시간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수근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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