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형주·정수근의 기억실험실
⑤동물의 기억
주인 냄새에만 활성화 반응
“긍정적 보상과 관련” 추측
불러도 오지 않는 고양이도
반응 않을 뿐 자기 이름 알아
시간·공간 등 맥락 결합하는
‘일화기억’, 동물에도 있을까
똑같진 않지만 유사한 기억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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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과 완전히 동일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비슷한 형태의 기억을 가진 동물들이 있음이 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사진은 동물의 뇌 인지기능을 연구하는 데에 쓰이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 미국 에머리대학 연구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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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고양이에게 한번쯤 서운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원래 고양이는 도도한 게 매력이라며 위안을 해보지만 가끔은 내 고양이가 아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양이는 무엇을 얼마나 기억할까? 개의 경우는 어떨까? 동물의 기억은 사람의 기억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다른가. 꼭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한번쯤 궁금했을 법한 질문이다.
고양이는 경험·이름 연결해 기억
개가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개의 뇌에서는 친숙한 사람을 대했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미국 에머리대학의 그레고리 번스 교수는 개들이 익숙한 냄새와 새로운 냄새를 맡을 때 뇌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이용해 조사했다. 개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으로 살펴본다니 개가 그렇게 협조적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훈련을 받은 개들은 자기공명영상 장치 안에서도 차분하게 실험에 응할 수 있다.
연구진은 개들에게 자기공명영상 장치 안에서 익숙한 냄새(함께 사는 사람 또는 개의 냄새)와 낯선 냄새(낯선 사람 또는 개의 냄새)를 맡도록 했다. 그랬더니 개의 뇌에서 후각을 담당하는 영역은 익숙한 사람과 개의 냄새는 물론 낯선 사람과 개의 냄새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뇌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미상핵(caudate nucleus)이라는 영역은 ‘익숙한 사람’에게 강한 활성화 반응을 보인 반면, 같은 집에 사는 익숙한 개의 냄새, 낯선 사람과 낯선 개의 냄새에 모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상핵은 긍정적인 보상에 반응하는 영역이다. 번스 교수는 개들이 가족 구성원들의 냄새를 긍정적인 보상과 연합하여 기억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개가 주인 냄새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는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다지 놀라운 발견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결과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을 사용해 사람의 뇌뿐만 아니라 개의 뇌와 인지기능도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불러도 대답 없는 고양이들은 어떨까? 일본 도쿄대학의 연구자들은 올해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한 연구에서 고양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조사했다. 연구진은 고양이 이름과 길이와 억양이 같은 일반적인 단어들을 연속해서 들려줬다. 고양이들은 단어들이 반복될수록 점차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단어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귀를 움직이거나 머리를 움직여 반응을 보였다. 즉 고양이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과 다른 비슷한 단어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자기 이름인지는 몰라도 자주 들었던 익숙한 소리라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같은 논문에서 연구진은 4마리 이상의 다른 고양이와 함께 사는 고양이도 자신의 이름과 다른 고양이들의 이름을 구분해서 기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순히 자주 들었던 소리가 아닌 자신의 이름에만 반응했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의 이름을 부른 뒤에 먹이나 장난감처럼 고양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행동, 또는 목욕을 시키거나 동물병원에 데려가는 것처럼 고양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연구자들은 고양이가 자기 이름과 좋아하는 것 또는 싫어하는 것을 연합해 기억하기 때문에 다른 익숙한 단어들과는 다르게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름을 불러도 오지 않는 고양이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단지 반응하지 않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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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에게 자기공명영상 장치 안에서 함께 사는 사람 냄새, 함께 사는 개 냄새, 낯선 사람 냄새, 낯선 개 냄새를 맡도록 한 결과, 뇌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미상핵이라는 영역은 함께 사는 사람에게만 강한 활성화 반응을 보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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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기억력이 3초라고?
기억은 정보를 저장하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인지기능이다. 고양이가 이름과 다른 단어를 구분하고, 개가 주인의 냄새를 다른 냄새와 구분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이다. 여러 연구가 개와 고양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물이 정보를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억력이 좋은 동물로 알려진 돌고래는 20년 전에 만났던 다른 돌고래를 알아볼 수 있다. 코끼리 역시 수십년 가까이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흔히 사람들이 ‘3초밖에 기억하지 못해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금붕어도 연구실에서 통제된 실험을 해보면 4주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초파리나 예쁜꼬마선충, 꿀벌처럼 단순해 보이는 동물도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다.
동물도 기억을 한다는 데에는 대다수의 연구자가 동의하지만, 동물이 사람과 같은 ‘일화기억’을 가지고 있는가를 놓고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일화기억은 ‘사실’을 아는 기억인 ‘의미기억’과는 구분된다. 일화기억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정보가 저장되는 반면에, 의미기억에는 시간과 공간의 맥락이 없다. 예를 들어 어제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던 것은 일화기억이다. 반면 축구가 어떤 운동인지 아는 것은 의미기억인데 그 정보를 언제 어디에서 배웠는지는 함께 기억하기 어렵다. 또한 일화기억은 일부러 외우려는 노력 없이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만들어지는 기억이다.
동물도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화기억을 갖고 있을까? 이런 물음의 답을 얻고자 연구자들은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언제, 어디, 무엇에 대한 동물의 기억을 검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니컬라 클레이턴과 앤서니 디킨슨은 1998년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에서 까마귀의 일종인 어치(scrub jay)가 먹이를 숨긴 경험을 마치 일화기억처럼 저장하고 있음을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보여줬다.
연구자들은 어치가 먹이인 벌레와 땅콩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 숨길 수 있게 했다. 한 조건에선 어치가 땅콩을 어느 장소에 숨기게 하고 5일 뒤에 벌레를 다른 장소에 숨기게 했다. 다른 조건에서는 벌레를 먼저 숨기게 하고 5일 뒤 다른 장소에 땅콩을 숨기게 했다. 시차를 두고 두 종류의 먹이를 숨긴 지 4시간 뒤, 어치가 어떤 먹이를 어디서 꺼내는지를 관찰했다. 실험 결과, 땅콩을 먼저 숨기고 벌레를 나중에 보관했던 어치는 벌레를 꺼내 먹었다. 반면 벌레를 5일 전에 숨겼던 어치는 벌레 대신 땅콩을 꺼내 먹었다. 땅콩보다 벌레를 먹이로 선호하는 어치는 왜 땅콩을 꺼내 먹었을까? 연구진은 어치가 벌레를 5일 전에 숨긴 것을 기억하기에 상했을 가능성이 높은 벌레 대신에 땅콩을 꺼내 먹은 것으로 풀이했다. 어치는 ‘어디’에 ‘무엇’(벌레와 땅콩)을 ‘언제’(5일 전 혹은 몇시간 전) 숨겼는지를 일화기억처럼 저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치뿐만이 아니라 원숭이, 쥐 등 다른 동물도 언제, 어디, 무엇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화기억’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심리학자 엔델 툴빙은 동물의 기억은 일화기억과 유사하지만 인간의 일화기억과는 다를 것이라고 추측했다. 툴빙은 언제, 어디, 무엇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처럼 ‘자각적 의식’을 가져야만 진정한 일화기억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이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 기억을 다시 경험하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공을 입에 물고 같이 놀자고 보챌 때, 지난주에 공원에서 신나게 놀았던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다시 경험하고, 30분 뒤에 밖에서 공놀이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자각적 의식이 있는 일화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지 않다면 인간의 일화기억과 유사해 보이지만 같은 종류의 기억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물 연구, 인간 질병 연구에 도움
동물이 자각적 의식을 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애초부터 동물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주관적인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람과 동물이 지각하는 시간은 다르다. 아주 빠른 속도로 깜빡이는 불빛은 우리 눈에 마치 깜빡이지 않고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 시각 시스템의 정보처리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깜빡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깜빡임의 지각은 동물 종마다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동물행동학 분야의 한 연구결과를 보면, 체질량이 작고 신진대사가 빠른 동물일수록 더 빠르게 깜빡이는 불빛을 지각할 수 있었다. 사람은 1초에 60회 정도 깜빡이는 불빛까지 구별할 수 있다. 반면 고양이는 초당 55회, 개는 80회, 다람쥐는 120회까지 구별할 수 있었고, 상어는 18회, 장수거북은 15회 정도로 측정됐다. 시각 시스템이 더 빠른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때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과 같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개의 경험을 직접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집에 혼자 남아 있는 반려견의 시간은 주인이 느끼는 시간보다 조금 더 길게 지각될지도 모르겠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1974년 <필로소피컬 리뷰>에 발표한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주관적인 의식 경험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했다. 박쥐는 초음파를 쏘고 반사되어 돌아오는 초음파를 분석해서 주위 환경을 인식한다. 시각을 통해 주변을 인식하는 보통의 사람이 박쥐가 경험하는 세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주관적인 경험이 모여 일화기억이 되고, 일화기억을 회상할 때는 과거를 의식적으로 다시 경험하게 된다. 사람과 동물의 주관적인 경험이 다르다면 경험의 저장인 기억 역시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동물의 주관적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면, 동물이 기억을 회상할 때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러 연구를 종합해 보면 인간의 일화기억과 완전히 동일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비슷한 형태의 기억을 가진 동물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동물들을 연구하여 인간 기억의 작동 메커니즘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나아가 치매처럼 일화기억의 손상을 일으키는 질병도 동물 모델을 활용해 활발히 연구된다. 동물의 기억 연구는 결국 인간의 기억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말하지 못하는 개, 고양이와 다른 동물들의 마음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수근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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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정수근의 기억 실험실: 기억은 뇌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쇠락하고 변형될까? 인류가 기억에 관해 호기심을 가진 것은 오래됐지만, 기억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한 건 최근 뇌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다. 정부 산하 뇌 분야 전문 연구기관인 한국뇌연구원의 박형주·정수근 선임연구원이 뇌과학이 밝혀낸 기억의 비밀을 번갈아 들려준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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