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0 06:01
수정 : 2019.12.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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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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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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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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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람 향복(香卜)은 사족 이문건가의 여비(女婢)로 어미는 삼월이고 아비는 누군지 모른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대여섯 살 무렵 갓 돌이 지난 동생 계향과 상전의 새 터전인 성주로 옮겨간다. 이로부터 20년 간 상전의 기록 속에 등장하는 향복은 인간과 물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슬픈 존재이다.
종모법(從母法)이 발호하던 시대, 향복과 계향은 어미 삼월과 운명의 공동체였다. 재산이 토지와 노비로 가늠되면서 여비의 출산은 논밭이 생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소위 지배층은 노비 수를 늘리는 일이라면 못할 짓이 없었는데, 양천교혼(良賤交婚)이나 여비의 몸을 교배(交配)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이다. 아버지로 내 존재가 증명되는 양인·양반과 달리 노비는 어머니로 증명된다. 상전의 입장에서는 노비의 아비가 누군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어린 향복은 어미 삼월이 업무와 태도의 지적을 받아 자주 신발로 뺨을 맞거나 매질을 당하는 현장에서 나이를 더해 간다. 두 딸의 생일마다 떡을 만들어 돌리던 어머니 삼월의 자식 사랑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열 살 남짓한 어린 향복에게도 역(役)이 주어져 예순을 바라보는 상전 남자의 이부자리를 깔고 머리를 빗기고, 세숫물과 약사발을 들고 내는 등의 심부름을 한다. 이원화된 가옥 구조에서 향복의 ‘근무지’ 상당(上堂)은 교학(敎學)과 봉제사 접빈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하가(下家)의 세속적 공간과 구분된다.
초등생 나이의 향복은 시대와 신분을 뛰어넘는 그 또래의 특징을 보이는데,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거짓말도 잘한다. 외출에서 돌아온 상전을 맞이해야 함에도 엎어져 자느라 정신이 없다. 자기주장이 있어 보이는 열 두 세 살의 향복, 예순의 상전에게 강간을 당한다. 상전의 부인은 친정 괴산에 머물고 있을 때인데, 여비들이 일체가 되어 이 ‘변괴’를 보고한다. 이후 부인은 거의 매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망신주는데, 식사하러 내려갔다가 아내의 구박에 되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자기변명도 늘어놓는다. “단지 근심과 걱정을 잠시라도 잊고자 무릎 위에 앉히고 놀다가, 희롱이 지나쳐 무람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지 정말로 간(奸)하려고 그랬겠는가?” 여색이냐 투기냐, 사족 부부의 리그전에 피해자 향복의 자리는 없다. 마님에게 머리채 잡히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가?
와중에 향복이 하가(下家)에서 잠을 자다가 웬 놈에게 강간을 당하는데, 상전은 어미 삼월에게 그 자가 누군지 알아보라고 한다. 향복이 굳게 입을 닫자 상전은 소리를 질러 막지도 않았고 강간범을 밝히지도 않는 걸 보니 향복의 심사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썼다. 강간범은 다름 아닌 상전의 종손자 14살의 천택으로 향복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았다. 천택은 종조부에게 글을 배우며 이곳에서 수년 동안 머무는데, 나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이현배(李玄培)라는 인물이다. 향복의 어미 삼월이 취할 수 있는 저항이란 상전을 찾아가 “도령과 향복이 그런 사이니 노인의 시중을 드는 게 어렵겠다”며 대놓고 망신을 주고, 마님을 부추겨 부부 갈등을 조장한 것이다. 도령과 간통하는 사이가 된 향복, 결국 임신을 하여 딸을 낳는다. 다만, 기록에는 아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향복은 곧잘 성난 얼굴로 상전을 대하고, 불러도 성실하게 대답을 않으며 무례하게 군다. 여비답지 않은 행동이 나온 것은 불쾌와 분노가 뒤섞인 성폭력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어린 향복이 ‘변괴’를 당했을 때 멀리 있는 마님에게 바로 알려 “소식 한번 빠르다”며 상전을 경악케 한 선배 ‘여비 연대’ 또한 피해 이후의 향복을 지켜준 힘이 아니었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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