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7 06:01
수정 : 2019.10.3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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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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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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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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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 김씨는 57살의 나이로 재혼을 하는데, 상대는 태조 이성계의 사촌 동생 이지(李枝)였다. 김씨보다 10살이 많은 이지는 위화도 회군 때 무공을 세운 원종공신으로 1415년(태종 15) 재혼 당시 종친의 일을 관장하는 돈녕부의 정1품인 영돈녕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이들의 혼인을 두고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사헌부는 종친의 수장 이지를 탄핵하는데, 음란하기로 소문 난 김씨와 혼인을 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태종은 “아내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혼인을 한다는데, 무엇이 문제냐?” 며 되물었다.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67살과 57살의 남녀는 재혼에 성공한다.
사실 김씨는 자유분방한 성생활로 이미 소문을 몰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16년 전 1399년(정종 1)에는 고위층 부인들의 간통 행적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 안에 김씨도 들어 있었다. 최상층 신분의 김씨, 아버지 김주(金湊)는 태조가 인정한 성곽 경영의 전문가로 신도(新都) 궁궐조성의 총책을 맡아 공을 세웠고,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다. 전 남편 고(故) 조화(趙禾)는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조카로 벼슬 또한 높았다. 아들 딸 손자까지 두고 환갑에 이른 김씨의 재혼은 남들보다 욕망이 다소 과한 점도 있지만 두세번 혼인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자식 보기에 민망했는지 몰래 추진하다가 혼인 당일에야 알게 된 자식들과 한바탕 몸싸움이 일어난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재혼을 거부하며 계부가 될 이지를 땅에 넘어뜨리고 울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첫날밤을 보낸 김씨는 “이분이 늙었는가 했더니 전혀 늙지 않았다”고 하여 또 입방아에 오른다. 이들은 이지가 79살로 세상을 뜨기까지 12년을 부부로 살았다. 이지가 죽자 ‘아름답고 음란한’ 김씨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김씨가 죽은 이지의 아내 자격으로 관작을 받게 되자 대신들이 거부하고 나섰다. “공신의 아내라 하더라도 부도(婦道)가 곧고 바른 사람이라야 작위에 봉해지는 것”이라며, 음란한 행실에 두 번 혼인한 경력의 그에게 정1품의 배우자 작위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김씨가 이미 종실의 일원이고 또 음행을 행한 것은 법이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기에 작위를 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통천 수령으로 있는 아들 조심(趙深)을 파면시키는 것으로 대신들의 불만을 무마시켰다. 이로부터 2년 뒤, 김씨의 손자 조유신(趙由信)이 ‘음란한’ 여자의 손자라는 이유로 요직에서 배제되었고, 다시 2년 뒤에는 충청 감사에 거론되던 김씨의 사위 박곤(朴坤)이 장모의 행실을 이유로 탈락했다.
김씨를 계기로 실행(失行)한 부녀의 자손에게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는 법이 추진되는데, “조유지는 추잡하고 더러운 행동이 이미 드러난 김씨의 손자입니다”로 시작하는 장문의 상소로 입법이 발의되었다. 이어서 김씨의 외손자 이사평(李士平)이 광흥창사 자리에서 밀려나고, 외손자의 사위 김효맹이 감찰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사위 박곤을 장인으로 둔 성중식이 감찰직에서 배제되었다. 모두 음란한 여자의 자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씨의 행실을 빌미로 그 아들은 물론 친손과 외손의 관직 삭탈이 계속되자 김씨의 두 손자가 왕에게 장문의 상서로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요지는 조상의 일로 그 자손을 평가하는 것은 옛 성인의 사람 쓰는 도리가 아니라며 아버지가 죄인이거나 어머니가 의롭지 못해도 그 아들은 역사에 남은 훌륭한 인물이 된 사례를 제시했다. 또 자신들의 조모는 사실은 실행한 일이 없으며 단지 문벌의 후예로서 화려한 주택과 의복으로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산 것이 발단이 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조모가 정확히 무슨 죄를 범했는지 헌부에 조사를 의뢰해달라고 하지만 그 청은 기각되었다.
도덕적인 문제로 죄를 물었던 수많은 사례를 들여다보면 사실은 도덕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이나 감정의 문제였다. 도덕 또한 시대나 세대에 따라 달라 고려 시대의 풍습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자기결정을 하며 살아온 김씨는 조선의 지배이념 신유학의 모델에 맞지 않았다. 조선의 정치이념은 감정가는 대로 욕심나는 대로 즐기려던 삶을 규제하는데, 유독 여성이 그 대상이었다. 나아가 여성 개인은 가족을 통해 관리되어 할머니의 잘못이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누가 의리를 지키고 명분을 닦고 절조를 가다듬겠느냐는 것이다. 김씨 사건은 세습 귀족에서 신진 사류로 권력의 이동이 이루어지던 조선 초기에 도덕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한 사례에 불과하며, 이후 여성의 성(性)을 통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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