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9.06 06:01 수정 : 2019.09.06 20:02

일러스트 장선환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드물지만 조선시대에도 여행을 목적으로 길을 떠나 산천을 유람하고 그 여행기를 남긴 여성들이 있었다. 양반여성은 출입규제에 묶이고 일반여성은 생계에 묶여 여행은 고사하고 나들이도 쉽지 않던 시대, 특히 금강산 유람이란 여자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중학생에 불과한 나이로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여 그 느낌을 기록으로 남긴 여성으로 김금원(金錦園, 1817년~?)이 있다.

1830년(순조 30) 봄 14살의 금원은 긴 여행길에 오르는데, 부모의 허락을 얻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남장(男裝)을 하여 원주 집을 떠나는데, 먼저 인근의 제천과 단양 등지 곳곳을 누비며 풍광을 즐기고 그 느낌을 적어나갔다. 그리고 몸을 동쪽으로 돌려 금강산을 향하는데, 단발령에 올라서는 형형색색의 만이천봉에 넋을 잃고 만다. 혹은 눈 더미 혹은 가부좌한 부처 혹은 쪽진 머리 혹은 연꽃송이 혹은 파초 잎 혹은 두 손을 마주 잡은 듯 혹은 절하는 듯. 수많은 남성 문사들이 금강산을 묘사해왔지만, 유독 그의 묘사는 수많은 봉우리의 서로 다른 자태를 잘 부각시켜 만이천봉의 만물상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금강의 내·외산과 관동팔경을 두루 섭렵하는 모험을 감행한 그에게 남다른 사연이 있었을 법하다.

김금원은 몰락한 양반인 아버지와 기생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녀 신분의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여공(女工)에서 배제되는데, 덕분에 글공부를 하게 되어 금세 사서삼경을 익히기에 이르렀다. 공부가 어느 정도 터를 잡기 시작하자 여자인 자신의 거처를 질문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금수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다행스럽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부귀한 집이 아닌 한미한 집에 태어난 것은 불행이다. 하지만 나에겐 하늘이 준 총명한 재주가 있으니 이것으로 견문을 넓히면 성취할 만한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나 김금원! 규방 깊숙이 들어 앉아 부녀의 법도를 지킬 것인가, 가난한 아낙으로 살다 이름 없이 사라질 것인가. 아니다! 결혼보다 강산을 두루 유람하며 공자 제자 증점(曾點)이 느낀 자연 일체의 경지를 나도 느껴보자. 여행을 결행한 내면적 동기를 담은 것으로 여행기 <호동서낙기>에 나와 있다.

“때는 경인년 춘삼월 내 나이 열네 살.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수레 안에 앉았는데”로 시작되는 <호동서낙기>에는 관동 여행을 필두로 서쪽 의주를 여행하고 서울에 정착하기까지 20년의 궤적과 감흥이 담겨있다. 그의 여행이 주목되는 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자아의 확장을 기도했다는 점이다. 김금원은 여자 중에도 공자와 맹자처럼 뛰어난 자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규중 깊숙한 곳에 박혀 있어 그 총명한 식견을 더 이상 넓힐 수가 없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눈으로 산하의 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는 사물의 무수함을 겪지 못한다면 그 변화의 이치를 통달할 수 없어 국량이 협소하고 식견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김금원의 의식세계는 어떤 점에서 200년 후의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여행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지만 그처럼 기록하거나 자기 삶을 성찰하고 확장해가는 계기로 삼기란 쉽지가 않다. “천하 강산은 크고, 고금 세월은 길구나. 인간사 가고 옴이 다 다르고, 생물의 생김새 또한 다 다르다. 산은 본래 하나이나 만 가지로 갈리어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이고 물은 본래 만 줄기이나 종국에는 모여 하나가 되지만 거기에는 천파만파의 다름이 있다.”(<호동서낙기>) 김금원은 신분에 따라 나중에 남의 소실이 되는데, 이 삶에서도 남다른 행보를 보인다. 같은 처지의 벗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짓고 시단을 형성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단이라 일컬어지는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가 그것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숙인의 앞선 여자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