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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06:01 수정 : 2019.08.09 20:51

일러스트 장선환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일제강점기에 조선 독립을 방해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었다. 기록으로 보고 이야기로 듣던 그런 자들이 횡행하는 요즘 과거 독립 운동가들이 느꼈을 비애를 알 것만 같다. 독립투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나라 내 종족의 자존감을 지키겠다는 열망이 불처럼 번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이겠다. 독립은 정신에 있다! 만주 벌판을 무대로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던졌던 한 노장 여성, 남자현(南慈賢, 1873~1933)이 남긴 말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에 큰 울림을 남긴 남자현은 그 별호부터가 범상치 않다. 여호(女虎), 여협(女俠), 여비장(女飛將)으로 불리던 그녀는 적장 암살이라는 무장 투쟁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독립군 사회를 유지하고 지원하는데 온 힘을 다한 ‘사회적 어머니’였다. 그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 석보에서 남정한(南廷漢)과 진성 이씨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의 억지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는데, 그 이후 전해 오는 암울한 소식들로 시골 선비들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지역의 지식인으로 제자들과 강론하던 아버지를 통해 감지했을 내 나라 내 동족을 향한 정서는 그녀의 평생을 이끈 동인이었다. 70여 제자들의 의병활동을 지원했던 늙은 아버지 남정한과 조선 독립에 투신한 중년의 남자현은 부녀이면서 대의(大義)로 이어진 동지였던 셈이다.

남자현은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7살 때 한글을 떼고 8살부터 한문을 시작한다. 12살에 <소학>과 <대학>을 읽고, 14살 때 사서(四書)를 독파하며 한시(漢詩)를 짓기에 이르는 등 소녀기에 이미 유교 지식인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살에 아버지의 제자 김영주(1871~1896)와 혼인을 하는데, 혼인 4년 만에 남편은 을미 항일의병에 나가 전사한다. 유복자를 양육하고 시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생계 노동에 뛰어든 남자현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최고의 부덕(婦德)에게 주어진 효부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렇게 아버지와 남편이 남긴 뜻을 간직한 채 시골의 아낙으로 산 23년, 시어머니의 타계를 기점으로 성년이 된 아들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오른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만주로의 망명은 당시 영양과 안동 지역의 지사들이 만주로 대거 이동해 간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넌 남자현 모자는 조선 독립을 위한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남자현은 독립군을 건사하는 일을 맡는다. 당시 여자들은 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독립군 대원들의 옷을 만들고, 먹을 것을 준비했다. 그 규모가 작은 나라 하나를 경영하는 것과 같다고들 했다. 남자현의 항일투쟁은 교육과 독립운동의 후원 및 구명, 그리고 무장활동으로 집약된다. 기독교도들의 연대의식과 희생정신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된 그는 종교 활동을 확대하는데, 북만주 12곳에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또 여자권학회(女子勸學會)를 조직하고 10여 곳에 여성교육 기관을 세우는 등 여성교육에 정열을 쏟는다. 남자현이 독립의 방법으로 교육에 주목한 것은 유년기부터 습득한 학습과 학문의 영향이 컸다. 이상룡과 김동삼, 채찬 등의 걸출한 투사들과 함께 일하는 사이 그녀는 강인한 지사로 변모해갔다.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의 한을 갚겠다는 좁은 개인사를 이미 벗어나 더 큰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53살의 남자현은 서울에 잠입하여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을 시도하는데, 실패로 끝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당시의 일화를 소개한 잡지 <부흥>(1934)에 의하면, 적의 추격을 받던 남자현이 조선인 홍순사에게 붙들리자 책망 반 설득 반의 어조로 말한다.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 리 타국에 와서 애쓰는 것은 그대와 나의 조국을 위함이거늘, 나를 체포하는 것은 조선인 자네 스스로를 체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소.” 폐부를 찔린 순사가 그를 놓아주지만, 결국은 체포되어 투옥되자 단식으로 맞서다가 환갑의 나이에 치열했던 한 삶을 마무리한다. 임종을 지키던 아들에게 돈 248원을 건네며, 200원은 조국이 독립하는 날 축하금으로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는 손자와 친정의 종손 교육에 쓰라는 유언을 남긴다.

공동체를 배반하는 자들은 늘 있었다.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려는 심술도 늘 있었다. 여자 교육을 위한 회의를 한다고 하면 “무슨 회요? 생선회요? 육회요?”하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몇 배의 짐을 지고도 우뚝 선 남자현이 자신을 체포한 조선인 경찰과 마주했을 때, 그가 지켜내고자 한 공동체란 어떤 그림이었을까. 문장을 하고 대의(大義)를 아는 정도에 불과했던 시골 촌부 남자현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떨쳐 일어난 그 의지와 실천은 우리 여성의 유산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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