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6 06:00
수정 : 2019.07.26 20:15
|
일러스트 장선환
|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
일러스트 장선환
|
모두가 만족하는 법 혹은 법 집행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약자를 짓밟거나 약자를 제물로 삼는 행위가 법의 이름을 걸쳐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소박한 주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도덕적 낙인이 찍혀 사회 밖으로 내쳐진 한 인간에게 다시 집단의 분노와 광기가 자행된다면 법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인간된 의미로 그 도덕이 누구를 위한 어떤 내용인가를 물어야 하지만, 법의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구일 수 있겠다.
1631년 4월7일, 시댁 식구를 저주한 신숙녀(申淑女)를 처리해 달라는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신숙녀는 본성이 악독하고 말이 많아 시아버지에 의해 쫓겨났다. 분개하고 원통한 나머지 비부(婢夫)를 시켜 무덤에서 유골을 파내어 집안에 들여놓고 저주를 행했는데, 시부 이복원(李復元)과 시백부 이효원(李效元), 시동생 이잠(李潛)이 잇따라 괴질에 걸려 죽었다. 이에 이씨 일족이 신숙녀를 관에 고발했지만 죄를 부정하는 그가 사족 부녀라 함부로 형추할 수도 없으니 사건을 상부로 이송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는 신숙녀의 행위가 부모를 죽인 ‘강상범죄’에 해당하는 만큼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다고 하고, 추고 경차관을 청양으로 내려 보낸다. 두 경차관 모두 혐의를 찾지 못하자 의금부는 ‘죄상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신숙녀의 옥사(獄事)를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린다. ‘저주 죄인’으로 지목되어 4달여 고통의 시간을 보낸 신숙녀가 자유의 몸이 되나 싶더니, 죽은 이효원의 아들 이해(李?)의 격쟁으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재심을 요구한 이해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함릉군에 봉해진, 이른바 권력가다. 그의 고발로 신숙녀를 무혐의 처리한 추고 경차관 두 사람이 도리어 옥에 갇히고, 신숙녀와 여종 천화(賤花), 비부 만수(萬水) 등은 서울로 압송된다.
신숙녀의 옥사는 강상에 관계되는 중대 범죄라 의정부·사헌부·의금부의 삼성(三省)이 함께 추국(推鞫)을 하게 되었다. 먼저 천화와 만수는 수차례의 신문에서 한결같이 혐의를 부정했는데,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만다. 형추를 받다 죽은 천화와 만수를 “변명을 하다 죽었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역사는 이들 편이 아니었다. 삼성추국의 결과 발표에 의하면, 신숙녀의 성질이 나쁘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그의 저주로 시가족들이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로써 신숙녀는 고소 당한 지 8개월 만에 완전히 풀려났다.
여기서 이 옥사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응징이 없을 수 없었다. 신숙녀를 무고한 자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갔다. 이에 의하면 사람의 죄악 중에 부모를 죽인 죄보다 더 큰 것은 없고 조선의 형법에도 이보다 더 무거운 형벌은 없다. 그런데 이런 막대한 죄악이 무고일 경우 반드시 무고자가 그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다. 이에 신숙녀를 고발한 이씨 종족 10여명이 구속되는데, 이 가운데는 신숙녀의 죽은 시동생 이잠의 처 유청숙도 포함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겠다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증거를 댈 수 없는 의심스러운 말만 잔뜩 늘어놓은 고소장으로 법 질서를 문란케 했으니 후대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엄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녀의 시가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대응한 결과 국왕 인조는 슬그머니 이들 편에 서게 된다. 왕은, 말이 많고 행실이 포악한 신숙녀는 증오의 대상이지 모두가 애석하게 여길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한다. 신숙녀를 다시 구속하라! 이 황당한 ‘어명’에 대신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는데,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되었다. 영의정 윤방(尹昉)은 삼성추국까지 하여 이미 완결된 사건을 원고의 호소로 다시 재개하는 것은 국법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고 했다. 위관(委官·재판장)에 임명된 우의정 김상용은 국법에 어긋난 이런 재판을 맡아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사직을 청했다. 왕은 온 조정이 신숙녀를 힘껏 구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자신도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왕은 부모의 죽음을 밝히려는 효자들에게 죄를 씌우는 것은 효행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왕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는지, 영돈녕 오윤겸(吳允謙)은 신숙녀에게 저주 죄를 물을 수 없다면 이미 드러난 사실 즉 시부모에게 패악질한 행위, 그것으로 죄를 씌우자고 건의한다. 결국 신숙녀는 다시 구속되었다.
각 주장이 대치하는 사이, 수인(囚人) 신숙녀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죽이든 살리든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들은 왕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서, 혹은 양심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판결을 지연시키고 있다. 2년도 넘게 끌어온 옥사, 국법에 더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었던 신숙녀는 1633년 6월3일,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여성을 제물로 삼고 마녀를 만들어 가부장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했던 역사가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법치의 틀이 잡힌 조선 중기에 사사로이 한 여성을 낙인찍어 희생시킨 이 사건을 보면 인조 대의 전란을 시대의 탓으로 돌릴 수만 없을 것 같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