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8 06:01
수정 : 2019.06.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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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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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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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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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비(女婢)는 신분사회를 지탱해 온 핵심적인 존재였지만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생활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주로 양반가 부녀의 필요에 따라 등장했다 사라지거나 마님이나 아씨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현대판 노예’라는 표현은 일상적으로 쓰면서 정작 ‘진짜 노예’의 삶은 몇 컷의 이미지가 대신하는 셈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상전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상전을 능욕한 죄로 법의 심판을 받거나, 주로 사건 사고 속의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드러난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비주(婢主)의 기록에 17여년 동안 등장하는 돌금(乭今)의 경우는 여비들의 일상으로 안내하는 자료다.
돌금은 16세기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사족 이문건 집의 여비다. 이문건의 일기는 1535년 11월1일 시작되어 죽은 아내를 산에 묻고 온 1567년 2월16일에 끝나는데, 돌금은 1546년부터 1563년까지의 기록에 나온다. 돌금은 남노(男奴) 야차(也叉)의 아내로 이 집에 처음 왔다. 이문건의 가족은 10여명이고 집에서 부리는 노비는 모두 39명인데, 그 가운데 여비는 17명이었다.
돌금의 주 임무는 주인 집 손녀 숙희와 손자 숙길의 젖어미였다. 통상 젖어미는 젖먹이 아이를 둔 여비 가운데서 골라 지정하는데, 젖의 양이나 품성을 따졌다. 처음에 이문건은, 갓 태어난 손자가 그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게 좋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온순한 성품에다 젖이 많은 눌질개를 젖어미로 지정했다. 그런데 눌질개가 자기 아들에게만 먹일 욕심에 젖이 적다고 핑계대며 닷새 만에 그만두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춘비를 지정한다. 춘비는 젖의 양이 많지 않고 또 성질이 너무 험악해서 손자의 젖어미로 삼기에는 꺼려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춘비를 젖어미로 삼았는데, 몇 달 후 유종(乳腫)을 앓다가 죽는다. 그 자리에 돌금이 투입된 것이다.
이문건은 손자가 병이 나면 돌금에게 한약을 달여 먹여 아이가 먹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8개월 된 손자가 고양이에게 얼굴을 긁히자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금은 뺨과 등을 얻어 맞는다. 무엇이 답답했는지 멋대로 관광을 떠나 한참을 놀다 온 그녀는 상전의 지시로 딸 같은 어린 여비 향복에게도 뺨을 맞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문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남편 야차가 죽자 돌금은 정성을 다해 초상을 치른다. 자신의 어미 삼월(三月)이가 사는 괴산에 남편의 무덤을 쓰고 싶어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돌금은 3일 후에 남편의 무덤을 다시 찾아가 제사 지내고 곡을 했는데, 어미 삼월이 동행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남편의 명복을 비는 굿을 하고, 죽은 남편의 오칠일제(五七日祭)도 챙겼다. 1553년 8월 어느 날 돌금이 남편의 첫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냈다며 이문건은 기록으로 남겼다. 남편이 죽고 난 6달 뒤 돌금은 아들을 낳는데, 유복자라 하여 이름을 유복(遺腹)으로 지었다.
돌금은 성미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상전의 며느리를 뒤에서 험담하다 걸리고 그 며느리를 업신여겨 상전의 화를 돋우는 일이 잦았다. 이때마다 주인은 남의 손을 빌려 몽둥이로 응징했다. 매를 맞더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었는지 그는 상전 며느리를 모욕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실 지능이나 능력 면에서 돌금이 그 집 며느리를 앞섰던 것이다. 남편과 사별한 지 10년 만에 돌금은 매혹적인 한 남자를 만나는데, 비부(婢夫) 종년(終年)이었다. 종년은 여비의 남편이지 노(奴)는 아니기에 상전 이문건이 관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종년의 아내 온금(溫今)과 돌금의 갈등이 어떠했는지 상전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상전은 기록에 “돌금이 종년을 간했다”고 하고 “비(婢)가 이미 종년에게 혹해 떠나질 않는다. 가증스럽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돌금은 상전에게 젖을 빼앗기고 매질을 당하는 비천한 여비의 신세지만 때론 즐기고 때론 분노하는, 감정과 욕망의 주인이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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