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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4 06:00 수정 : 2019.06.14 19:52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여자를 특수 공물(貢物)로 취급하여 국제관계에 이용한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다. 이른바 공녀(貢女)인데, 고구려와 신라에서 중국의 북위(北魏)에 여자를 보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는 멀리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본격적인 공녀는 원의 간섭이 시작된 고려 후기부터였고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후기에는 청나라에 바쳐졌다. 고려시대만도 비공식적인 공녀까지 포함하면 최대 2천명이 넘는 숫자라고 한다. 말 설고 물 설은 낯선 땅에서 그녀들이 꾸렸을 삶은 차치하고 울면서 끌려간 그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무엇일지 후손된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 계기가 무엇이든 내 나라를 벗어난 삶, 그 고충이란 말과 글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기록으로 전하는 한 사람, 한계란(韓桂蘭, 1410~1483)을 통해 공녀들의 복잡한 심사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태종과 세종 연간에 모두 114명의 공녀가 보내졌는데, 당시 중국이 요구한 항목에는 처녀, 여종, 집찬녀(요리담당), 가무녀 등이 있었다. 처녀라고 한 것은 궁녀나 황실 가족의 처첩으로 삼기 위해서인데, 나이는 11살에서 18살 사이였다.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과 통곡을 뒤로하고 떠난 공녀들이 목적지인 베이징에 도착하기 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 도중에서 호송하는 환관들의 희롱에 수모를 당하는 것은 예사이고, 겨울에는 매서운 만주 벌판의 추위 속에서, 여름에는 무더위로 병을 얻기가 일쑤였다. 한계란의 경우는 황제의 후궁감인데다 오빠가 직접 호송에 참여했기에 각별한 호위를 받으며 이동해갔다.

19살에 조선을 떠난 한계란은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공녀로 가게 된 처음에 그는 언니를 영락제의 후궁으로 바쳐 이른바 황친(皇親)의 특혜를 누리던 오빠 한확을 향해 울부짖었다. “동생 한 명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남아 있는 동생마저 팔려고 하는가!” 칼로 이불을 찢고 마련해 둔 혼수감을 뿔뿔이 흩어버리기까지 한 그였다. 그런 분노 때문인지 몸이 아파 1년을 지체한 후에 떠나게 된 그에게 중국 땅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영락제의 후궁 여비(麗妃)에 봉해진 언니가 황제의 죽음으로 순장된 것이 불과 4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은 “언니가 순장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또 떠나는구나” 라며 살아있는 송장 보듯 했다.

한계란이 중국 황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오는 바가 없다가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성종조에 그의 존재가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한다.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가 바로 한계란의 조카이기 때문인데, 60을 넘긴 나이였다. 명황실의 후궁이 된 한확의 두 여동생과 조선 왕실의 핵심 일원이 된 한확의 딸, 결코 우연적인 별개의 사실이 아니었다. 어쨌든 고모 한계란과 조카 소혜왕후는 서신 교환을 통해 각별한 ‘자매애’를 쌓아간다. 조카는 고모에게 조선의 특산물을 챙겨 보내고, 고모는 조카에게 중국의 책과 금은 보화 등을 실어 보낸다. 진헌품을 한씨에게 전달하고 돌아온 신하에게 조선의 왕은 “인정(人情)으로 가져간 물건을 적게 여기진 않던가?”라고 하며 반응을 살핀다. 그만큼 중국의 황제 권력과 거리상 가깝게 있던 한씨는 조선에서 정성을 다해야 하는 각별한 존재였다. 명 황실의 한씨가 조선의 특산물을 무리하게 요구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조국’에 대한 그의 심사는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권력 형성에 ‘조국’을 적극 활용하는 정황들이 흘러나온다.

19살에 중국으로 ‘끌려간’ 한계란은 1483년(성종 14) 57년의 황실 생활을 마감하고 74살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공신(恭愼)이라는 시호를 받은 그는 베이징 서쪽 향산에 묻혔다. 그를 두고 조선쪽에서는 “고국을 생각하여 늘 울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죽어서도 한 조각 마음은 응당 고국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명나라 쪽은 그의 묘비명에 “동국에서 태어나 중원으로 진출했네. 황실을 공경히 섬기고 몸은 향산에 묻혔네”라고 적었다. 고국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조선과 ‘세계 시민’으로 자부심을 가질 것이라는 중국, 어느 쪽이 한계란의 심사에 더 가까울까.

공녀는 한 역사 시기에 국한된 특수한 사건이라기보다 이름은 다르지만 언제나 있어왔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현재성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최상층에 속한 한계란의 이야기도 이렇게 속이 시끄러운데, 열악한 처지의 하층민 공녀들은 어떤 대우를 받다 어떻게 생을 마감하였을지, 그 아픔을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제 와서 그들의 행적을 찾고 기억할 방도는 별로 없다. 다만 국제관계에 동원되어 활용되다가 내쳐지는 20세기판 ‘공녀’들의 기록을 통해 그 삶을 짐작해볼 뿐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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