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31 06:00
수정 : 2019.05.31 20:07
|
일러스트 장선환
|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
일러스트 장선환
|
환향녀는 특정한 역사의 산물이지만 의미가 파생되면서 여성 비하의 용어가 되어 왔다. 당시 용어로는 속환녀(贖還女)인데, ‘적에게 잡혀가 값을 치르고 찾아온 여자’를 뜻한다. 17세기 병자년의 난리를 피해 사대부들은 안전하다는 강화도로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지만 섬이 함락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淸軍)의 포로가 되었다. 적들은 신분이 높은 여자들을 주로 골라갔는데, 여자라 힘이 약한데다 나중에 속환비를 넉넉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돈 있는 자들이 직접 가서 속환해온 경우 말고, 끌려간 지 거의 1년 만에 850여 명의 공식적인 속환이 이루어졌다. 이 안에는 여자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사지(死地)에서 살아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또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환향녀들. 윤씨의 사례는 당시 정치인들의 민낯을 여과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1638년(인조 16) 3월, 윤씨의 시부모는 아들 내외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단자를 예조에 올린다. 잡혀갔다 돌아온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윤씨의 시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장유(張維)이고 시어머니 김씨는 김상용의 딸이며, 남편은 장선징(張善?)이다. 훗날 장선징의 행장(行狀)에 변란 때 부모를 잘 보호하여 화를 피하게 한 아들로 부각되고 있어 가족 중 윤씨만 적진으로 끌려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윤씨의 나이는 25살 안팎으로, 아들이 하나 있었다.
며느리를 내치려고 하는 장유는 봉림대군의 장인으로 ‘나라 어른’의 자리에 있었지만 사회적 책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뜩이나 혼란한 정국에 짱돌을 던진 경우가 되겠는데, 전후의 복구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속환녀를 주요 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그렇다. 그를 지지하는 척화파들의 논리 또한 억지 주장으로 일관했다. “부녀들이 사로잡혀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인조실록>)
포로 속환을 위해 동분서주한 좌의정 최명길은 장유의 요구가 ‘공익’을 저해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 사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和氣)가 상하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국왕 인조도 속환 부녀에게 책임을 묻는 꼴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시아버지 장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윤씨의 이혼은 유야무야되는 듯했다. 그런데 2년 6개월 후 장유의 아내 김씨가 죽은 남편의 유언이라며 다시 아들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소를 올린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김씨는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어른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다”고 했다. 칠거지악을 내세워 이혼을 관철시키고자 한 것이다. 죽은 사람의 소원이라며 떼를 쓰는 안사돈에게 왕은 훈신의 독자임을 감안하여 장선징의 이혼을 특례로 허락하고, 그 외 어떤 이혼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영을 내렸다. 하지만 장선징이 선례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대부의 가풍’에 누가 될까 환향한 부인과 갈라섰다.
윤씨와 이혼한 남편 장선징은 경주 이씨와 재혼하여 딸 둘을 낳았고, 윤씨의 아들 장훤은 계모 이씨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전남편 장선징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오빠로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그런데 예전 장유 부부가 절개를 잃었다는 구실로 며느리를 내쳤듯이, 자신과 그 조상의 제사를 맡아줄 손자 장훤도 사회에서 내침을 당하게 되었다. 한 재상가가 장훤과 혼인을 추진하자 송시열은 환향녀의 소생이라는 점을 들어 ‘추잡함이 막심’하다며 조롱하고, 실절(失節)에 무감각한 대신을 공격했다.(<기축봉사>) 장훤에게는 하급 관직 참봉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환향녀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생모와는 연이 끊어져 계모의 자식임을 증명하자 천륜을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다시 공격을 받는다.
남편과 아들의 연관 검색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윤씨, 그녀는 누구이며 그 후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판서 윤근수의 증손녀이자 영의정 윤두수의 종증손녀로, 군수 윤종지(尹宗之)의 딸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당시의 정국에서 실세에 속했던 영의정 윤방(尹昉)이나 판서 윤순지 등은 가까운 친족이다. 윤씨의 여동생은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의 부인이고 그 아들 심익현은 효종의 차녀 숙명공주의 부마가 되었다. 숙명공주에게 그녀는 시이모가 되는데, 장선징과의 혼인이 지속되었다면 외숙모이기도 하다. 사실 윤씨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윤씨의 남동생 윤타(尹?)가 누이들과의 우애가 돈독했다고 하니 상처로 얼룩진 생이 형제자매로 인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