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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7 06:01 수정 : 2019.05.17 19:55

일러스트 장선환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조선시대 여자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이미지나 선입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교육에서 배제되어 무지(無知)하고 위치는 남자보다 낮고 천하며, 노동은 거의 노예에 가까웠던 존재.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나 여행자들의 시선에서 유래한 이러한 이미지는 부분적인 진실일 수는 있어도 조선여자의 전부일 수는 없다. 소개할 강정일당(1772~1832)만 해도 무지나 억압의 이미지로는 전혀 걸맞지 않은 삶을 살았다.

정일당이 세상에 눈을 떴을 때 맞닥뜨린 것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극심한 가난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신분은 양반이되 생계가 곤란한 가계들이 많았는데, 강정일당의 집이 그랬다. 스무 살이 되어 인근 충주에 살던 6살 아래의 윤광연과 혼인을 하지만 시집 역시 주거 공간이 없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형편이었다. 혼인을 하고도 그는 어머니를 따라 바느질과 베 짜는 일로 생계를 잇다가 3년이 지나서야 남편과 함께 살게 된다. 윤광연 또한 생계를 잇느라 공부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 그들은 과천의 외딴 빈집에 들어가 살며 서당을 열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모했다. 가난이 일상이었던 시대에 학동이나 일감이 충분할리 만무하다. 정일당은 ‘밥을 짓지 못한 지가 사흘이 되었고, 마침 글 배우는 아이가 호박 덩굴을 걷어 왔기에 국만 끓여 올리니 미안하다’는 내용의 쪽글을 상과 함께 들여보낸다.

당시 이 부부의 화두는 궁핍함 속에서 어떻게 품위 있게 살 것인가였다. 끊어진 공부를 이어 미래를 도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부부는 ‘학문 남편’과 ‘노동 아내’로 역할을 나누었다. 사실 아내 정일당은 생계형 노동 외에 지식 노동도 겸하는데, 남의 제문이나 행장을 남편 대신 써 주며 학인 윤광연의 번거로움을 덜어준다. 그녀는 남편의 학업을 독려하면서 남편의 제자를 면밀히 분석하여 교육 방법을 조언해주고, 남편과 어울리는 벗들의 면모를 살펴서 사귈지 말지를 결정해주는 일 등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조교’이던 정일당은 남편의 ‘스승’으로 역할이 격상되는데, 성인의 도를 얻고자 스스로 학문의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서른이 되어 글을 읽기 시작하니, 배움에 동서를 가리기 어렵네. 이제라도 모름지기 노력만 하면 옛 사람의 경지에 가까워지리라.”(<정일당유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부엌 안에 책상이 있었고 밥상 위에 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해 다져진 정일당의 성리학은 관념의 세계에서 누리는 자족과는 달리 일상적 실천을 중시하는 성격이 강하다.

영양 결핍인지 그들의 5남 4녀의 자녀들은 1년도 되기 전에 모두 사망하는데, 이 비운을 딛고 부부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정진한다. 공부에 힘을 내지 못하는 남편에게 “성현은 남자이고 당신 역시 남자이니 무엇이 걸림이 되어 성현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며 독려하던 정일당. ‘의롭지 못한 부귀는 뜬 구름 같다’던 그녀는 61살의 나이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윤광연을 아내의 영전에 그리움으로 얼룩진 수편의 제문(祭文)을 바치는데,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인 그리움과는 많이 달랐다. 윤광연이 아내를 잃은 것은 단순한 내조자가 아닌 한 스승을 잃은 것이다.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구에게 물어볼 것이며, 내가 뭘 잘못하는 게 있어도 누가 바로잡아줄 것이오!” 몸과 마음의 양식 즉 삶의 전부를 주던 아내가 떠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윤광연.

남편 윤광연은 아내의 4주기를 맞아 문집을 간행하는데, 당시 이 사건은 특종감이었다. 여성의 문집을 간행한다는 사실 자체도 그렇지만 생계도 힘겨운 처지에 아내의 원고 뭉치를 들고 동분서주하는 남편의 모습은 빈축을 사기에 충분했다. 문집을 내기에 앞서 그는 아내가 남편인 자신의 이름으로 썼던 예전 작품들을 모두 원작자로 돌려놓았다. 이른바 대부자작(代夫子作)의 이름을 단 작품들은 친족이나 지인들을 위한 행장, 제문, 묘갈명, 회고나 추모, 상례·제례 문답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녀의 대작(代作)은 남편의 위상을 높이려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적이고 공적인 학문 토론의 장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부라는 인연에도 숭고함이 있다면 바로 정일당 강씨와 윤광연의 경우가 아닐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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