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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3 06:00 수정 : 2019.05.03 19:52

일러스트 장선환

[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조선시대 이야기들 속에서 불교나 사찰은 주로 현실 도피적 공간으로 그려졌다. 사회적 진출이 막힌 여성들의 심리적인 해방구이자 세속에서 실패한 여성들의 도피처로 활용된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권력관계에서 약자인 여성과 유교사회의 변방인 불교가 결합하여 빚어낸 이야기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조선중기 이예순(1587~1657)의 사례는 여성과 불교의 적극적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예순(李禮順)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인조의 ‘남자’라고 불리던 최고 권력가 이귀(李貴)의 딸로 태어나 15살에 비슷한 집안의 자제(子弟) 김자겸(金自兼)과 혼인한다. 이미 불교에 심취한 자겸은 유교 아닌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던 아내 예순과 의기투합하는데, 부부의 청춘은 불도를 캐는 데 불살라진다. 이들과 함께 구도의 길을 걷던 또 한 사람 오언관(吳彦寬)은 자겸의 유일한 벗이자 참판 오겸의 서자였다. 세 사람은 거의 매일 머리를 맞대고 불도 토론하기를 밤이 늦도록 한다. 자겸은 평소 “그대와 같은 아내와 오언관과 같은 벗이 있어 일생이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던 자겸이 두 도반(道伴)에게 ‘계속 함께 불도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15살에 불교에 입문하여 71살에 입적하기까지, 비구니 이예순의 신앙과 행적은 〈광해군일기〉 〈어우야담〉 〈공사견문록〉 등 비교적 많은 곳에 전해 온다. 그는 서인(西人) 강경파인 아버지 이귀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생사를 오가는 굴곡을 겪기도 한다. 북인이 주도하던 광해군 정권이 이귀를 영원히 퇴출시킬 음모로 절치부심하던 사이 딸 예순이 걸려든다. 1614년(광해 6) 함양의 산속에서 수상한 남녀 무리가 붙잡혔는데, 예순과 언관 등이었다. 사족 부녀가 외간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큰 죄이던 사회. 부부라고 둘러대며 우선 위기를 모면코자 했지만 조사결과 집권당의 최대 정적 이귀의 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의금부 마당으로 압송된 예순과 언관에게 불륜을 상상한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임금의 친국(親鞫)을 받게 된 예순과 언관 그리고 정이(貞伊). 공초에 의하면 예순은 도를 닦으러 경상도 산속으로 떠나는 언관에게 간곡한 청을 넣어 따라 나서게 되었다. 예순에게 불도를 배우던 목사 고 나정언의 첩 정이도 동행하며 각 종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남편과 사별한 예순은 수차례 비구니로 출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 때 비로소 뜻을 이루게 된다. 예순이 현모양처 공부를 때려 치고 불교를 선택한 것은 유학을 배워도 여자로서는 임금을 바르게 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지극한 이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불도를 배워 세상의 은혜에 보답하며 일생을 살고자 했다. 그는 여자로 불도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은 문수와 원왕부인을 닮고자 했다.

이 공초를 통해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오언관은 선(禪)이 깊고 불교서적을 모두 열람했으며 변론을 잘하여 젊은 사람들의 우상이었다. 예순 또한 불도가 깊어 귀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는데, 정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예순은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아도 얼굴에는 광채가 나고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 세 사람 모두 언관과 예순의 불륜설에 대해서는 콧방귀를 끼었다. 아버지 이귀도 “내 딸은 부처에 빠진 것이지 정절을 잃은 것이 아니다”며 항변했다. 그들은 남녀관계의 기존 이념을 넘어서 있었지만, 현행법을 감안하여 음란과 실행(失行)의 의혹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예순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궁중의 내불당 자수궁에 남아 불사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광해군의 후궁 김개시와 모녀 관계를 맺는 등 왕실 여성들의 요청에 불심으로 응답하며 존재감을 키워갔다. 자료를 종합해보면 예순의 도력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같다. 그런데 1623년(광해군 15), 예순은 신앙인으로서 최대의 위기를 맞는데, 반정을 주도하는 아버지 이귀를 숨겨야 하는 딸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체포령이 떨어지기 전 왕의 여자들을 움직여 아버지를 구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은 성공을 거둔다. 이 사건은 불자로서의 예순에게 큰 짐이 되었을 것이다. 반정 후 궁궐을 나온 그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하는 등 불교 진흥에 남은 생을 바쳤다. 동대문 밖 청룡사와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 불사를 그녀가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예순은 당시 일반적이던 도피로서의 여성 불교가 아니라 여성과 불교에 적극적인 힘을 축적한 역사적인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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