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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1 09:22 수정 : 2019.06.01 09:26

임진영·염상훈의 앙성집 짓기
⑥ ‘원형집’ 계획안

제주 고산집에서 배운 ‘공유’ 방식
열한 세대가 정해진 날짜만큼 나눠 써
부모님+우리집, 2세대 함께 사용
살림은 최소화하고 자연 즐기기로

남편이 만든 세번째 계획안
원형의 공간에 티(T)자형 내부
마당 세개에 탁 트인 시야까지
과감하지만 편안한 공간 기대

티(T)자형 집에 원형의 담을 둘러 사적인 마당을 세개 확보한 원형집은 거실과 주방에 전면 유리창을 내어 환하게 바깥을 볼 수 있다. 염상훈 제공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현실적인 예산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집을 지어야 할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이 비용이 세컨드 하우스에 합리적인 수준인가에 대한 질문까지, 실질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부모님이 머물 살림집에서 부모님과 우리 가족, 두 세대가 공유하는 집으로 바뀐 것이다. 두 세대가 함께 쓰는 집이라 생각하니, 많은 전제가 달라졌다. 집을 공유하는 방법에 아이디어를 준 것은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세컨드 하우스, ‘제주도 고산집’이었다.

공간이 아닌 시간을 나눠 쓰는 것

제주도 고산집은 강미선 이화여대 교수(건축학)가 기획한 ‘함께 쓰는 두번째 집’이다. 비교적 중심지와 떨어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의 평평한 땅에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쇠막(외양간) 등 세 동으로 된 제주도 전통 가옥 형식의 낡은 시골집을 고쳤다. 에이루트건축의 이창규, 강정윤 소장이 리노베이션을 맡아 원래 집의 모습은 찾아주고 새로운 삶의 형태가 가능하도록 공간을 정비했다. 소박하지만 친숙한 동네 풍경을 만드는 제주도 돌담집의 틀은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내부 공간을 더했다. 마루의 높낮이 차이를 내부에 그대로 살린 부분이나, 목구조의 기둥을 유지하면서도 내부를 털어내어 넓고 중첩된 공간을 만든 장면들이 참 편안했다.

열한 세대가 조합을 이룬 이 고산집은 세대별로 1년에 정해진 날짜만큼 예약해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예약은 공유문서(구글캘린더)에 입력해 어느 날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 여러 세대가 각기 다른 일정으로 쓴다는 것은 그 집을 함께 가꾼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에 올 가족들을 배려하는 공동의 매뉴얼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만은 온전히 한 세대의 가족을 위해 존재하는 집이다. “공유는 공간을 나누어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나누어 쓰는 거예요.” 강미선 교수의 이 표현은 서로의 독립성은 존중하면서 함께 나누는 공동선을 만드는 핵심적인 말이 아닐까. 공간을 나누어 쓰기 위해 필요했던 성숙함 대신, 그 뒤 다른 시간에 이 집을 쓸 사람들을 위한 배려심이 커지는 집이다.

이렇게 여러 세대가 한 공간을 번갈아 쓰기 위해서는 집 곳곳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과 가꾸는 일 모두 필요하다. 이 말은 누군가의 살림으로 채운 집이 아니라, 최소의 필요한 기구만 갖추고 누구나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숙박시설의 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에어비앤비와 리조트 회원권 사이에 놓인 좀 더 친밀하고 독립적인 공유주거의 형태다. 침대정리 서비스나 별도의 청소 서비스가 없기 때문에, 각자 머무르고 떠날 때 집의 반듯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배려가 되고 공유에 대한 책임을 보여준다. 따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 독립성이 충분히 확보된 상태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실천하는 이 공유 방식은 매우 매력적이다.

한편, 이런 세컨드 하우스의 또 다른 매력은 살림집을 벗어난 공간이 주는 심플함에 있다. 생각해보면 호텔이나 펜션이 주는 아늑함의 정체는 남이 해주는 청소와 밥에 있기도 하지만, 일상에 쌓여 있는 무수한 살림이나 정리해야 할 물건 없이 벽과 창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온전히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을 좀 더 가볍게, 정돈된 일상으로 만들고픈 바람은 시각적인 피로감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집, 최소의 살림으로 유지되는 미니멀리즘 공간에 열광하게 한다. 당장 집을 떠나 비일상의 공간에 머물고 싶은 이유가 이 ‘비워진 공간의 여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지금은 두 세대지만, 부모님 세대와 우리 가족이 각각 머무를 때, 그리고 함께 머무를 때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살림집과는 상당히 다른 공간을 그리게 되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부모님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앙성집의 공간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리되었다. 전제는 살림집을 벗어나 공간의 여유를 누리는 것, 서울에서의 삶과 다른 ‘비일상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었다. 적절하게 보호되면서도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햇빛과 바람을 쐬고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이다. 일상의 환경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연을 관찰하거나 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세컨드 하우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사치가 아닐까.

원형의 담과 티(T)자형 집을 하나로 이은 원형집. 내부 건물이 원형집을 가로지르면서 서로 다른 성격의 마당 세개를 만든다. 거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앞마당과 나무데크를 깐 옆마당, 이끼를 심은 뒷마당까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전망이 펼쳐진다. 염상훈 제공
각 방향에서 서로 다른 장면

몇가지 안을 거쳐 남편이 보여준 계획안은 지금까지 고민했던 여러 숙제를 한번에 풀어내었다. 외부에 대해 사적인 공간은 지키되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 것, 보호된 공간 안에서는 외부로 환히 열려 있는 것, 원형의 집이다. 원형의 담과 집을 일체화하면서 거실 부분은 전면 유리창으로 마당을 향해 열었다. 3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집이지만 시야가 트이면서 집이 넓어진 느낌을 준다. 방은 최소의 침실 2개만 두고 거실과 주방을 구획하지 않고, 더 여유롭게 흐르는 집을 만들기로 했다. 시각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집을 확장하는 것이다.

건물이 티(T)자로 내부를 가로지르면서 각기 다른 마당 세개도 생겼다. 앞마당, 옆마당, 그리고 옛집의 뒤란(집 뒤 울타리 안)에 해당하는 뒷마당까지 한집에 담겼다.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은 아이에게 너무나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가장 큰 앞마당은 거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고, 나무데크를 깐 옆마당은 혼자 조용히 숨어들 수 있는, 벽에 기댄 아늑한 곳이다. 북쪽의 뒷마당은 그늘에 강한 이끼나 녹색식물을 심어, 초록빛 강한 작은 정원이 될 거다. 단조로울 수 있는 원형 공간을 집이 나누면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곡면이 펼쳐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공평한 원형집이지만 어느 방향에서든 각기 다른 방식의 장면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일상적인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남편은 다른 비례감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3차원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들은 흔히 공간의 물성과 비례를 조절하면서 시퀀스(연속성)를 만든다. 공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넓게 보여주거나 시야를 차단하거나, 벽을 막다가 갑자기 펼쳐지는 공간을 연속적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하게 할지에 대한 의도를 담는 것이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방식이다. 때론 담담하고 낮은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2층 높이의 거실을 통해 상승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비틀린 계단을 통해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 비례와 공간감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눈으로도 경험하지만 우리의 몸이 직접 반응하는 경험을 만든다. 층고가 높거나, 창의 높이가 조금만 달라져도 다른 풍경을 보게 되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설계안을 확정하면서 우리가 원형집에 공감한 것은 그곳에서 느낄 경험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튼튼하고 합리적인 집이 좋은 게 아닌가 고민했던 아버님과 어머님도 이 계획안을 보고 만족스러워한 것은 과감한 듯 보이지만 편안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경험하지 않아서 몰랐던 낯선 공간을 끄집어내줄 수 있는 게 건축의 미덕이 아닐까 싶은 순간이었다. 이제 기본 설계안을 확정하면서, 우리는 세세한 부분에 대한 협의를 진행할 계획에 들떠 있었다. 그것이 엄청난 결정장애의 허들을 넘는 과정이라는 걸 미처 모른 채 말이다.

임진영은 건축저널리스트이자 기획자다. 건축전문지 <공간> 편집팀장을 지냈고, 현재는 <마크> <도무스> 등에 글을 쓰며 건축물 개방 축제인 ‘오픈하우스서울’을 기획하고 있다. 남편인 염상훈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이자 건축가다. 움직이는 파빌리온 ‘댄싱 포레스트’ 등을 설계했다. 부모님과 함께 쓸 ‘앙성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과 좋은 공간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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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임진영·염상훈의 앙성집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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