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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1 18:17 수정 : 2019.04.21 19:1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 단어가 눈에 걸렸다.

지난 1월31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스탠퍼드대에서 연설했다.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연설이었다. 북과의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런데 한가지가 걸렸다. 비핵화를 얘기하다가 곳곳에 대량살상무기를 언급했다. “비핵화 과정이 최종적으로 되기 전에 포괄적인 신고를 통해 미국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전체 범위에 대해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최종적 비핵화의 범위에 대량살상무기를 포함시킨 것이다. 혹시 대량살상무기는 핵무기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비건 특별대표는 확실하게 답했다. “궁극적으로는 핵분열성 물질과 무기, 미사일, 발사대 및 다른 대량파괴무기 재고에 대한 제거 및 파괴를 담보해야 한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더 확실해졌다. 트럼프 정부는 핵무기뿐만 아니라 생물무기 및 화학무기의 폐기까지 요구했다. 그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19일 일본과의 외교·국방장관회의 이후에도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북한의 최종적이며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라고 하면서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서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와 탄도미사일, 그리고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과 시설들을 모두 포기하도록 계속 북한을 압박할 것입니다.”

‘최종적이며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라는 목표가 시나브로 ‘대량살상무기 포기'로 확장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을 노리고 있다고 한 것은 과도한 확대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들고나온 것은 파격이다.

또 다른 말이 눈에 걸렸다.

하노이에서 북의 리용호 외무상이 말했다. “영변 핵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 시설을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의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한다.” 그 이전까지 북이 보여주었던 협상 행태를 완전히 벗어난 파격적인 것이었다. 2015년 이란이 공동 포괄적 행동계획에서 동의한 조처를 훨씬 뛰어넘는 비핵화 조처를 약속한 것이었다.

우선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북이 동의한 것은 흑연감속원자로만이었다. 6자회담에서는 흑연감속로와 재처리 시설이 핵심 대상이었다. 이란의 합의는 나탄즈와 포르도의 농축 시설과 아라크 중수로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북의 제안은 훨씬 더 포괄적이다. “영변 핵단지 전체” 안에는 연구용 원자로와 흑연감속원자로도 있고, 경수로도 있다. 핵연료 가공 시설이나 폐연료봉 임시 저장소뿐만 아니라 플루토늄 추출 시설, 우라늄 농축 공장이 있다. 삼중수소 생산 시설로 의심받고 있는 시설도 있다. 이 “모든 핵 시설을 통째로” 포함하겠다는 것이다.

북은 이 광범위한 핵 시설을 ‘폐기’하겠다고 제안했다. 북은 제네바 합의에서 핵 시설의 ‘동결’에, 10·3 합의에서는 ‘불능화’에 합의했었다. 9·19 공동성명에서는 ‘포기’로 합의를 봤다. 핵무기를 생산하지는 않겠지만 핵물질과 시설을 완전히 없애는 폐기에는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란은 핵시설의 폐기나 동결은커녕 감축 내지 전환에만 합의했다. 북의 과거 합의나 이란 합의와 비교하면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하노이 제안은 큰 진전이다.

그러나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이 제안은 협상장에서 즉각 거부되었다. 영변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의심 시설’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과거 금창리와 같은 선례도 있고 이란 핵 합의도 공개되지 않은 시설의 사찰 방식을 포함했다.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상응조처로 북은 유엔 제재의 부분적 해제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최종적 비핵화’ 이전에는 어떠한 해제도 없다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량살상무기’다. 협상 의제가 이렇게 확장된다면 ‘빅딜’이 아니라 ‘딜브레이커’가 된다. 북은 영변 핵 시설에 대해서는 파격을 보였지만 핵물질과 핵무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협상의제를 이렇게 축소한다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량살상무기’와 김정은 정부의 ‘영변 핵 시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협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트럼프 행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김정은 정부는 ‘영변 핵 시설’뿐만 아니라 핵물질과 핵무기의 폐기 로드맵과 상응조처를 내놓고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하노이에서 불거진 두개의 파격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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