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7 17:52
수정 : 2019.04.18 15:23
권도연
샌드박스네트워크 크리에이터 파트너십 매니저
1년 전쯤의 이야기다. 연락이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출 중학생과 그의 담임인 내 친구를 천만다행으로 연결시킨 건 다름 아닌 ‘페메’(페이스북 메신저 서비스)였다. 친구는 걱정과 허탈함을 섞어가며 나에게 말했다. 그동안 수없이 연락을 취했으나 예상치 못한 연락 수단에서 아이는 단 몇초 만에 답변을 해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아이의 대답은 명쾌하기까지 했다. “모르는 번호는 전화 안 받았고요, 문자나 카톡은 원래 안 보는데요.”
모든 세대가 동일한 서비스를 사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의심해보지 못했을까. 고백하건대 스멀스멀 소문은 들려왔다. 예컨대 요즘 학생들은 카톡을 학급 단체방 공지 용도로만 이용한다더라, 페메가 대세라더라 하는 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곧장 “왜?”라고 되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단 말도 안 된다는 의미가 더 강했던 듯하다.
선생님인 친구의 사례를 접하고 나서야 떡하니 실감이 났다. 그길로 중학교 학생들을 만났는데,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내 질문에 응답했다. 되레 “그걸 아직 모르셨어요?”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에는 꽤 납득할 만한 몇 지점이 있었는데, 큰 틀에서는 단순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감시를 피하고 또래 간의 집단성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집단과 똑같은 메신저 서비스라니. 내 프로필 사진이 또래가 아닌 집단에 보여진다니. 언제든 어른들의 연락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곤 그제야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공간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본능이다. 전쟁의 공포부터 뒷골목의 땅따먹기 놀이까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내 공간을 지키려는 의지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인터넷의 연결은 나만의 공간에 깊이를 더하는 매개체가 됐다. ‘커뮤니티’라는 단어가 생겼다. 우리는 마치 비밀의 방을 만들듯 허락한 이에게만 내 공간을 허용했다. 누군가는 세이클럽으로 공간을 기억했고, 누군가에게는 싸이월드가 남았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방어구역을 찾아 열심히 ‘이사’를 다녔을 뿐이다. 그러곤 문을 잠갔다.
최근 아이들의 새로운 이사 조짐을 들었다. 가장 핫한 플랫폼인 유튜브가 또다시 등장한다. 이용 방법이 조금 색다르다. 흔히 유튜브는 동영상을 올리고, 시청하고, 좋다 싫다 댓글을 다는 활동 정도만 생각하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여기서도 ‘우리만의 공간’을 찾아냈다.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유튜브를 메신저로 쓰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채널에 업로드한 뒤 그 게시물의 링크를 서로 공유한다. 해당 게시글의 댓글창을 메신저처럼 활용하고, 대화를 마친 뒤에는 동영상을 삭제한다. 핵심은 ‘휘발성’에 있다. 동영상이 삭제되면 자연히 댓글로 남아 있던 그들의 대화 기록도 삭제되는 셈이다. 우리끼리 나눈 이야기는 댓글창에서 우리끼리만 공유하고, 영원히 없애버릴 수 있다. 부모님이 몰래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보게 될 리 없다. 어른들이 때때로 도외시하는 나만의 사생활을 지킬 수 있는 대책으로 새로운 활용법을 선택한 것이다. 참 신통방통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인터넷 커뮤니티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공감이다. 비단 요즘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집단을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다만 그와 동시에 방어의 중요성도 커졌다. 커뮤니티의 색이 짙을수록 외부와의 차단은 엄격해진다. 공감대가 흐려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방어벽의 높이는 그룹 내 친밀감의 강도와 비례했다. 청소년들이 자꾸만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 헤매게 된 것도 같은 결이리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완전히 공감해줄 자신이 없다면, 그곳을 너무 궁금해하지는 말자. 비밀 공간의 문을 억지로 열어봐야 남는 건 역효과뿐이다. ‘문밖에서 노크하는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친구네 학급의 가출한 학생이 자기 공간의 걸쇠를 풀고 답변을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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