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4 17:36
수정 : 2019.04.1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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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미세먼지.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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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일상생활과 정치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면서 미세먼지 대책을 최우선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를 설립하고, 동북아 국가들의 다자간 협력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 일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기꺼이 수락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과연 미세먼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미세먼지의 재난은 몇달이나 몇년 사이 생긴 것이 아니다. 물론 올해는 미세먼지가 유달리 심했다. 사흘이 멀다고 하늘은 고농도 미세먼지로 뒤덮여,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도시는 뿌연 미세먼지의 바다에 빠진 것 같았고,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물도록 권고하는 긴급 문자를 받았다. 나라가 온통 미세먼지의 공포에 휩싸이는 비극이었다.
정부는 미세먼지를 물리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해상에서 유입되는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인공강우 실험을 했고, 옥외 공기정화기 설치를 계획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임기응변이나 전시행정이라 꼬집었지만, 환경 주무 장관은 국민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지, 이것을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했다.
미세먼지로 인한 재난은 그 자체로 비극인 동시에 해답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비극이다. 이와 관련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우화가 거론된다.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처리되지 않은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편익을 위해 대중교통보다 개인 승용차를 타고자 한다. 그 결과 주인이 없는 하늘은 미세먼지로 가득 차고, 더 이상 기업 활동이나 자가운전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유지의 비극’은 차라리 ‘희극’이다. 이 우화를 제안했던 생태학자 하딘은 공유지를 이용하는 목동들의 행동을 무책임한 것으로 ‘희화화’하면서, 공유지의 합리적 관리를 명분으로 이를 사유화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유지의 사유화는 배타적 독점과 새로운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면한 환경 재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비극과 희극은 관객들에게 주는 슬픔과 즐거움에 따라 구분되지만, 더 중요하게는 문제의 해결책 유무와 그 방식에 따라 갈린다. 비극에는 문제의 해결책이 없고, 불행과 슬픈 파국으로 끝이 난다. 반면 희극에는 어떻게 해서든 해결책이 마련되고, 행복과 희망으로 막이 내린다. ‘공유지의 비극’은 해결책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희극이지만, 그 해결책이 오히려 갈등과 불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비극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극과 희극에 관한 또 다른 학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철학자 지제크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던 9·11테러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각각 비극과 희극으로 비유했다. 그의 비유는 비극적 역사가 나중에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는 함의에서 나아가, 희극처럼 보이는 사건의 반복이 본래의 비극보다 더 끔찍한 파국으로 끝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설명에 의하면, 비극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이 비극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대처 가능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그러고는 비극의 책임이 느슨한 법적 규제나 기술적 대처능력의 미흡, 또는 다른 외적 원인이나 자연적 조건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국가는 이러한 비극에 대한 자신의 대처능력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국민들이 이러한 주장을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한다.
미세먼지의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에는 미세먼지 배출 규제 강화와 미세먼지 저감 운송수단으로의 기술적 교체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국외 유발 미세먼지에 대한 국제 공동대책의 마련이나 정체된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인공강우 실험도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미세먼지 관련 각종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는 나름대로 미세먼지의 비극에 대처할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관료적 대책이나 상품화 전략으로 미세먼지의 비극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대처 가능한 것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된다. 현시대는 지질연대로 ‘인류세’라는 새로운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지구 환경에 끼치는 인류의 영향이 얼마나 심대하며, 따라서 인류가 얼마나 큰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이제라도 사회의 정치경제 구조와 인간의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병두
한국도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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