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유길준·장인성 지음/아카넷(2017)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그의 나이 26살 되던 1881년 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유길준에게 맡겨진 임무는 일본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단기간에 근대화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일본이 서양과 200년간 통교해왔지만, 본격적인 발전은 구미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며 서양의 제도와 법규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부터라고 보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일본과 서구가 부강해진 원인을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에 한정하여 그들의 과학기술만 수용한다면 전통적인 질서와 정신세계를 온존시키면서도 근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어쩌면 이런 오해는 유길준은 물론 오늘날의 우리도 품고 있는 오해가 아닌가 싶다. 우선, 문명사 변화의 흐름이 ‘대륙’이 아닌 ‘해양’으로부터 왔다는 지정학적 이유는 어쩔 수 없더라도 단지 일본이 조선보다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우리보다 23년 먼저 개화할 수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본 스스로는 페리 제독에 의해 근대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난학자였던 스기타 겐파쿠가 일본 최초의 의학번역서 <해체신서>를 발간한 177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만약 이 시점을 근대의 기점으로 본다면 일본은 우리보다 100년 이상 앞서 근대를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일본을 ‘왜’라 하여 낮춰 보았지만, 1800년 무렵 일본의 인구는 조선의 두 배인 약 3000만명이었을 만큼 큰 나라였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농촌에 살았지만, 도시나 ‘마치’(町)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이 무려 10%에 달했다. 에도 인구가 100만명이었고, 오사카와 교토 역시 35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놀라운 수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국가존망의 중대한 위기 앞에서 막부라는 기존 정치질서를 전복하고 천황을 새로운 상징질서의 구심점으로 삼아 개혁 정치를 이끌어 나갈 주체세력이 존재했다.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이들은 젊고 유능하며, 야심만만했지만, 기존의 막부 체제에서라면 결코 중용될 가능성이 없었던 하급 무사 계급의 젊은이들이었다. 조선에도 이들과 흡사한 이들이 있었다면, 바로 양반 집안의 서자인 ‘서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길준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인물 중에는 17살 최연소의 나이로 어윤중의 수행원이 되어 따라나선 윤치호가 있었다. 그 역시 유길준과 더불어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었지만, 양반이었던 유길준과 달리 윤치호에게는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그는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1884년 미국 공사를 만난 자리에서 윤치호는 이렇게 한탄했다. “이 나라는 서얼을 죽이는 것을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훗날 그가 친일파가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그가 나라를 버리기 전에 먼저 나라가 그를 버렸던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지(하방)옥(탑방)고(시원)’를 전전하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우리들이 어떤 희망을 주고 있는지도 함께 말이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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