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04 10:24
수정 : 2019.05.04 10:29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포드 매덕스 브라운, ‘당신의 아들을 받으세요,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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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매덕스 브라운, <당신의 아들을 받으세요, 어르신!>, 미완성, 1857년, 캔버스에 유채, 런던 테이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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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복제품을 본 적이 있다. 185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이탈리아 토스카나(투스카니) 대공작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이 다비드상 밑에는, 짝꿍처럼 붙어 있는 조각상이 있었다. 따로 유리 상자에 보관돼 있는, 조그마한 무화과 잎사귀 석고상. 관련된 안내문을 읽어보니 기가 막혔다. 19세기 당시 빅토리아 여왕이나 귀부인이 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이 무화과 잎으로 다비드상의 성기를 가렸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기절 방지용이라는 설명에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여성들이 무화과 잎사귀 없는 성기를 우연히 봤다면, 아마도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해 정신을 잃은 척해야 했을 것이다. 너무나 잘 재현된 ‘외간 남자의 성기’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으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비난받는 시대였으니까. 그런 이유로 박물관 직원들은 여성이 관람하러 올 때마다, 다비드상에 걸쇠를 달아 잎사귀를 수없이 붙였다 떼는 피곤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유독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여왕 통치시대(1837~1901)의 단면이다. 피아노 다리조차 음탕해 보인다며 기어코 주름 장식이 달린 ‘바지’를 피아노에 입혀 놓는 시대였으니 오죽했으랴.
하지만, 햇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 엄숙주의가 휩쓸었던 빅토리아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성매매율이 가장 높았으며 혼외자 또한 넘쳐났다고 한다. 포드 매덕스 브라운(1821~1893)의 <당신의 아들을 받으세요, 어르신!>은 이런 위선의 시대를 고발하고 ‘그릇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풍자하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 젊은 여인이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자신의 아기를 건네고 있다. 그런데 아기 엄마를 표현한 방식이 특이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빛, 유독 붉게 타오르는 뺨, 넋이 나간 듯한 표정 등. 이 모든 장치는, 그림이 모성 찬양과 출산 축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녀 앞에서 아이를 받는 이는 누구일까? 힌트는 제목에서 얻을 수 있다. 팔을 뻗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 여인 뒤 거울 속에 비치는데, 여인은 그 아기 아빠를 ‘어르신’(Sir)이라고 부른다. 아기는 혼외자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여성의 머리 뒤쪽에 걸려 있는 거울은 마치 후광 같아서, 그녀를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여인과 아이는 죄가 없으며, 혼외자를 낳게 한 무책임한 남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하고 있다. 버젓이 외도를 즐기며 숨겨진 아이까지 둔 ‘신사’가 이 그림을 봤다면 질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브라운 역시 빅토리아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도 한때 혼외자의 아빠였던 것. 브라운은 모델 에마 힐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은 사실을 쉬쉬하다가 3년 뒤에야 그녀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857년, 브라운은 갓 태어난 아들 아서와 부인 에마를 모델로 <당신의 아들을 받으세요, 어르신!>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그림을 통해 잠깐이나마 혼외자를 두었던 ‘부도덕’을 스스로 고발하려 했던 걸까? 하지만 그림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불행이 닥쳤다. 태어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아서가 갑작스레 숨을 거둔 것이다. 어쩌면 브라운은 ‘위선’에 대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였는지 브라운은 <당신의 아들을 받으세요, 어르신!>에 더 이상 붓을 대지 않았고, 결국 그림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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