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⑥ 동물고고학의 기여
익산 왕궁리 발굴 현장의 구덩이
알고 보니 창고 아닌 화장실
기생충 알 분석 통해 당시의
위생 상태, 조리 방법 등 알아내
유골에 붙은 파리 구더기 통해
장례식 풍습 알아내는 등
기생충, 곤충, 동물 흔적 통해
과거 복원하는 동물고고학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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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시 왕궁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왕궁의 대형 화장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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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어느 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발굴 현장에서는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그동안의 발굴조사 성과를 전문가들로부터 검토받는 학술회의였다.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이홍종 교수(고려대)의 눈에는 좁고 긴, 그러면서도 깊은 구덩이 3개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 유학 중에 우연히 스쳐 본 고대의 화장실을 기억해낸 그는 발굴 담당자들에게 흙을 떠서 기생충 연구실에 분석을 맡기자고 제안하였다.
사실 이 구덩이들은 조사원들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애물단지였다. 구덩이 바닥에 물기와 유기물을 잔뜩 함유한 검은 흙이 쌓여 있었기에, 조사원들은 부여 관북리 유적처럼 과일과 식료를 저장하던 창고 시설로 판단하였다. 흙 속에서 짚신, 나무 막대기와 함께 식물 씨앗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조사원들은 안심하고 온몸에 흙이 묻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비좁은 구덩이 안에서 조사에 몰두하였다. 반들거리는 나무 막대기는 창고에서나 쓰임직한 일종의 자(尺)라고 판단하고 깨끗이 씻어서 애지중지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흙을 퍼내면 퍼낼수록 악취는 심해졌다.
기생충 연구실의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흙 속에서 회충, 편충, 간흡충 등 인간에 기생하는 기생충의 알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 것이다. 이 구덩이들이 인분으로 가득 차 있던 화장실이란 이야기다. 반들거리는 나무 막대기는 자가 아니라 볼일을 본 뒤 뒤처리하는 도구였다. 발굴단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처음 발견한 고대의 화장실이니 속된 말로 대박을 친 셈이지만, 몇개월 동안 몸에 밴 악취의 정체를 알게 된 조사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오물이 보물
백제 사비기(538~660년)에 사용되던 왕궁성 내부에 마련된 화장실은 당시로서는 최신식의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구덩이 깊이 박힌 기둥 위에 걸쳐놓은 나무판자 위에 주저앉아 볼일을 보면, 깊은 구덩이에 떨어진 오물은 흐르는 물에 의해 하수도로 모이고, 곧 성 밖으로 배출되는 위생적인 방식이었다. 가장 큰 화장실은 길이가 10m를 넘고, 깊이가 3.4m에 이르는 대형이었으니, 7~8명이 동시에 볼일을 볼 수 있는 규모였다. 왕궁에서 생활하던 관리들의 공중화장실이었던 것이다. 나무로 만든 뒤처리 막대를 불결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물을 가득 담은 항아리를 옆에 놓고 볼일을 볼 때마다 씻어서 여러 번 사용하도록 한 나름대로의 친환경 제품이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11년에 출간한 <백제의 왕궁을 찾는 20여 년의 여정>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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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군수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남성용 변기.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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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에는 경주 동궁의 인근에서 잘 다듬은 돌 2장으로 발판을 만들고, 그 아래에 지름 12㎝ 정도의 구멍을 뚫은 석조를 설치한 명품 화장실이 발견되었다.(<한겨레> 2017년 9월27일치) 동궁은 태자의 별궁이므로 신라 왕족들의 화장실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왕궁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럭셔리한 화장실이다. 수많은 인구가 거주하던 신라 왕경의 분뇨 처리 방식은 어떠했을지 도시공학적인 궁금증도 생긴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부여와 익산 등 왕도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변기가 발견되었다. 모습부터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구분된 변기는 서민들이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왕족과 귀족, 승려 등 사회적 체면의 유지가 필요한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은밀한 곳에서 변기에 처리한 오물은 자연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엄격한 하수 체계에 따라 처리되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변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당시의 최고 지배층이 거주하던 곳이란 논리도 그럴듯하게 성립된다.
이동식 변기나 럭셔리한 화장실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오물이 잔뜩 담겨 있던 익산의 화장실이다. 오물이야말로 보물이기 때문이다. 기생충 알을 분석해 당시 사람들의 위생 상태, 음식의 종류와 조리 방법을 알 수 있다. 덜 소화되어 배출된 각종 식물유체를 통하여 음식을 섭취한 계절, 식물의 종자도 파악할 수 있다. 간혹 실수로 흘린 생활용품이 썩지 않고 보존되는 경우도 있다. 화려한 금관이 묻혀 있는 왕릉으로는 풀 수 없었던, 고대의 환경과 위생 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화장실 고고학의 매력이다.
파리가 복원해준 장송의례
파리는 바퀴벌레와 더불어 대표적인 해충이다. 그런데 이 파리의 구더기 덕분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경우가 일본에서 있었다. 일본에는 횡혈묘라고 하여 구릉의 경사면, 혹은 평지를 굴처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묘제가 5~6세기 무렵 미야자키와 가고시마 등 남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생토층 안에 무덤이 위치하기 때문에 내부가 완전히 진공 상태가 되어버려 부장된 유물이 원래 모습 그대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인골도 고스란히 남아서 때로는 피부가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비위가 약한 독자는 이제부터 몇줄 건너뛰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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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야자키현 에비노시 시마우치의 지하횡혈묘와 인골(2016년 촬영).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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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간혹 유물이나 유골의 표면에 쌀알처럼 생긴 파리 구더기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곤충학자의 연구로 보통 파리가 아니라 죽은 동물의 썩은 살을 먹고 사는 파리의 구더기임이 밝혀졌다. 완전 밀폐된 공간에 파리 구더기가 남으려면, 사망 뒤 시신이 곧바로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리가 시신에 알을 낳고, 알이 구더기가 될 때까지 외부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망에서 매장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무덤 바깥에서 보낸 사실은 빈(殯)의 의례가 진행되었음을 증명한다. 보잘것없고 더러운 파리 구더기가 규슈 남부에서 전개된 장송의례의 일부를 복원해준 것이다. 앞으로 우리 학계에서도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파리 구더기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날이 올 것이다.
기생충과 곤충만이 아니라 각종 동물의 유체나 흔적을 통해 당시의 환경을 복원하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동물고고학은 이미 우리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패총에 버려지거나 무덤에 공헌된 각종 어패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포유류의 종류를 밝힘으로써 당시의 음식 문화를 복원할 수 있다. 뼈에 남아 있는 해체흔을 통해 전문 도축업자의 존재를 추정해보고, 말의 어금니 법랑질이 마모되어 상아질이 노출된 현상을 통해 재갈을 물렸음을 알 수 있다. 자연 상태의 멧돼지가 집돼지로 가축화되는 과정도 추적할 수 있다.
필자가 판단컨대 동물고고학의 최대 잔치는 2011년도에 국립경주박물관이 개최한 ‘우물에 빠진 통일신라 동물들’이란 특별전이었다. 2000년도에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에 위치한 통일신라 우물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상으로 한 이 전시는 유독 어린 학생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조사된 두개의 우물 중 1호 우물에서는 개(4마리), 고양이(5마리), 소(4분의 1짝), 말(어금니 1점), 멧돼지(뼈 4점), 고라니(뼈 1점), 사슴(1마리), 토끼(뼈 1점), 두더지(2마리), 땃쥐(6마리), 쥐(71마리), 시궁쥐(1마리), 새매(뼈 1점), 까마귀(다수), 오리(1마리), 꿩(3마리), 참새(뼈 14점), 메추라기(뼈 1점), 뱀(뼈 6점), 개구리(다수), 그리고 고등어, 대구, 도미, 연어, 상어, 광어, 민어, 복어, 붕어, 숭어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동물유체가 출토되었다. 최대 미스터리는 열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가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한 상태로 발견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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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발견된 개의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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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실수로 빠진 것일까? 아니면 희생으로 우물에 던져진 것일까? 8세기 말에서 9세기 전반, 신라 사회는 극심한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가뭄이 자주 발생하여 곳곳에 우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기우제를 치르면서 용왕에게 각종 제수품을 바쳤다. 가엾은 어린아이가 희생양으로 던져진 것인지, 실수로 빠져 죽은 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각종 제기와 함께 제수품으로 동물들을 넣은 것인지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동물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다. 쥐나 개구리, 뱀은 우물에서 살다가 수명을 마쳤을 것이다. 소나 말, 멧돼지 등 대형 포유동물은 우물에 스스로 들어갔을 리가 없다. 함부로 죽이면 국법에 의해 처벌받는 소와 말까지 넣은 것을 보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최고 귀족들이 제의의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각종 바닷고기는 제수용품으로 우물에 던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주 앞바다에서 나지 않는 고등어와 민어는 먼 곳에서 염장을 한 뒤에 가져온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비극적인 삶을 마친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쩌면 이 문제의 해결은 동물고고학이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려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많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는 동물뼈였기에, 어린 관람자들에게는 토기나 철기보다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인문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큰 흥미를 갖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박물관의 전시 주제는 좀 더 다양해져야 한다.
말 발자국이 말하는 것
2006년 9월, 필자는 경기 화성 용주사 뒤에 있는 송산동유적을 발굴조사 중이었다. 3~4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논, 그리고 논에 물을 대는 인공수로가 발견되었다. 논바닥을 정리해보니 지름이 10㎝ 정도 되는, 둥그렇고 움푹 파인 흔적이 무수히 많이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논에 심은 작물의 흔적으로 보았지만 결국 소와 말의 발자국임을 깨닫게 되었다. 갈라진 것은 소, 갈라지지 않은 것은 말의 발자국이었다. 이 시기에 소와 말의 흔적이 논에서 발견된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가축을 쟁기질에 이용하였는지 수확된 작물을 운반하는 데에 이용하였는지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지는지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지 무질서한 모습인지를 밝혀내면, 이 동물이 짐을 싣고 이동하였는지 말뚝에 묶여서 서성거렸는지 마음대로 뛰놀았는지도 밝힐 수 있다. 발자국 크기를 하나하나 계측한 이유는 말의 품종에 따라 키와 발굽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계측치를 분석한 결과 송산동의 말은 소형마보다는 크고 중형마보다는 약간 작은 품종임을 알게 되었다. 나무 아래로 통과할 정도로 키가 작지만 힘이 셌던 고구려의 과하마, 소형마의 대표 격인 일본의 기소마와의 관련성을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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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 송산동 유적의 논에 찍힌 발바닥 자국. 분홍색은 사람, 노란색은 말과 소.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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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최초로 말과 소의 발자국을 상세히 조사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발굴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의 발자국 형태는 앞발굽과 뒷발굽이 다르다는 점, 평보(보통 걸음), 속보(평보보다 조금 강도를 올려 빠르게 걷는 것), 구보(천천히 달리는 것), 습보(전력으로 달리는 것)에 따라 발자국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진작 알았다면 발자국을 좀 더 세밀히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터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앞으로 한번 더 말 발자국을 조사할 기회가 생긴다면 동물고고학자만이 아니라 장제사(말의 발굽에 편자를 박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를 초빙한 다학제적 연구팀을 꾸릴 것이다. 21세기의 고대사 연구는 이렇듯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통섭의 마인드를 요구하고 있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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