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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0 18:07 수정 : 2019.10.21 14:06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소식을 접한 순간,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암투와 반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임금 세종과 반체제 세력의 수장 가리온 사이의 언쟁이 인상 깊었다. 가리온은 세종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백성이 글을 알게 되면 읽게 될 것이고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즐거움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지혜를 갖는다. 누구라도 지혜를 갖게 되면 쓰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쓰겠는가. 욕망이다.” 요즘처럼 언중들의 배설적 욕망이 어지러울 때면 유독 가리온의 일침이 떠오르곤 한다. 물론 백성에게 냉소를 보이는 가리온이 세종의 눈에 고와 보일 리 없다. “니가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정말 천한 일이로구나.

”세종의 바람대로, 그리고 가리온의 우려대로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시대가 됐다. 세종이 자로(字路)를 뚫었다면 우리는 언로마저 뚫린 세상을 살고 있다. 1인 미디어 시대. 이제는 읽고 쓰기를 넘어 아예 미디어를 소유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 이제 즐거운 일만 가득하게 될까? ‘천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가리온의 경고처럼 대중은 무섭다. 이번에도 온라인의 말들이 쌓여 안타까운 일이 반복되지 않았나.

‘기레기’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뭇 기자들의 보도 윤리가 지적되는 세상, 학자들 사이에서는 표절을 넘어 ‘자식 끼워넣기’와 ‘품앗이’가 횡행한 세상이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대중들의 언술마저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때는 민중이니 뭐니 추켜세우면서 모두에게 말할 권력이 생기면 그게 민주주의라 믿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갈수록 명확해지는 건 그 어떤 이도 결코 무결한 존재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정체를 알기 힘든 누군가의 말이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 칼은 표적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 적개심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누구라도 ‘지혜’를 가지는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이 어지간해선 틀리지 않을 것이란 아집도 커진다. 누군가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말과 글을 쏟아낸다. 확증편향, 언어폭력, 그리고 몰염치. 이런 것들은 민주주의로 가는 성장통일까? 아니면 현재의 도덕적 파국을 가리키는 증상인 것일까?

심지어 국민성 같은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도 해본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중국인은 어떻고 일본인은 어떻다는 식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만드는 동안, 정작 외국인들은 한국인을 유독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들로 본다는 것이다. 맞는 말 같기도, 틀린 말 같기도 하다. 성장통? 증상? 문화적 특성? 뭐가 됐든 우리에게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커뮤니케이션 윤리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0여년 전 인터넷 공론장 같은 말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쟁점이 될 만한 것은 과연 모든 이가 거기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정도였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자 확실해지는 것은 결과가 생각보다 참혹하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누구도 공론장이란 말을 감히 하지 않는다. 때때로 온라인에도 훈훈한 미담이 있더라는 소문이 들리긴 하지만, 엄연히 이곳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즉 자연상태의 형국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시민윤리 교육이든, 각 조직의 자율 규제든, 아니면 일각에서 나오는 ‘설리법’(악플금지법)이든, 무언가 타율적 장치가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어쩌면 아예 근본적으로 사회 통합을 위한 이념 자체를 새로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혹스럽다. 외적 장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야만적 상태의 확산과 지속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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